2019년 5월 말 <옥천신문>에는 두 기사가 주요하게 실렸다. 오랜 염원이던 ‘옥천로컬푸드직매장 개소식’과 ‘박물관 없어 잃어버린 옥천 유물 1천여점’이다. 두 기사는 지역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첫 발걸음을 뗀 ‘자급’, 아직도 요원한 ‘자치’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누군가에게는 ‘로컬푸드’라는 건 유행이나 트렌드에 불과하고, 인구 몇 안 되는 농촌지역에서 ‘지역 박물관’이라는 건 예산 낭비가 아니냐고 일갈할 수 있지만, 그건 엄연히 시작해야 할 자급의 역사이고 또 자치를 억압하는 수탈의 역사다.
로컬푸드 직매장은 소비시장이 도시에 생기지 않고 옥천에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왜곡된 유통구조를 바로잡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머릿속으로는 ‘농산물 가까운 곳에 모아 놓으면 직매장 되겠네’ 하면서 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직매장을 열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과 관계가 수반되어야 했다. 단일 품목 대량생산이라는 현 생산구조에서 다양한 지역농산물을 구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이는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생산 품목을 서로 조정하면서 이뤄지는 고도의 운동이다.
대기업 위주의 까다로운 시설 기준으로 생산되는 가공식품은 사실 농가에서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지방자치단체 예산이 투입되는 가공센터가 건립되어서야 그나마 물꼬가 트였다. 그 밖에도 난제는 수두룩했다. 우유와 닭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이 있음에도 지역 안에서 소비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우유는 서울의 한 업체에서 전량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지역으로 유통되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닭은 도계시설이 없어 육계농장이 있음에도 판매되지 못하고 있다. 직매장이 생기면서 자급의 고민은 이처럼 구체화됐다.
사실 옥천로컬푸드직매장의 개소는 옥천 농업과 먹을거리 30년 역사의 결정판이고 시작점이다. 아스팔트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농산물 수입 반대 투쟁과 지역농업발전위원회 건설, 학교급식지원조례, 옥천푸드지원조례 제정, 옥천살림협동조합 창립 등 여러 지역 농업의 역사들이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면서 만들어진 피와 땀의 결과물이다.
자급은 이제 시작됐지만 아직 자치는 요원하다. 박물관조차 없어 빼앗긴 옥천 유물 1천여점이 이를 상징한다. 물론 박물관은 지자체장이 자체 예산으로 지으면 된다. 군 단위 박물관이 흔하진 않지만, 인근 진안군과 금산군에서도 만든 사례가 있는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국가가 지역 자치를 고민했다면, 문화유물의 제대로 된 보존을 고민했다면 현장에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박물관이 없다는 이유로 청주와 서울 등지에서 수탈해 간 옥천 유물이 1천점이 넘는다. 지역은 발굴의 대상일 뿐, 유물의 제공자였을 뿐 이도 저도 아닌 셈이다. 안터 마을에서 발견된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충북대 박물관에 있고, 탄화곡물과 함께 최초로 출토된 신석기시대 대천리식 집자리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청주박물관, 한남대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정말 찾기 힘든 고려 기와 가마터는 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역 주민들은 이런 유물들이 지역에서 발굴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어디가 발굴 현장인지도 표지판 하나 없어 짐작할 수조차 없다.
나라가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국비를 지원해 모든 지자체에 지역 박물관을 건립하도록 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것은 문화정책으로도, 자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만, 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 있는 지자체장이라면 지역 박물관을 짓고 빼앗긴 유물 환수운동을 벌여 다 찾아오려 할 것이다. 아직 옥천의 분위기는 요원하다.
대상화된 지역은, 식민화된 지역은 여전히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수탈 중이다. 체감하지 못할 뿐. 농촌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도시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몫까지 다 해치우면서 지역 소멸과 폐교를 안타까운 시선, 아니 미개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정과 시혜, 우월감과 멸시 어떤 시선이든 거부한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낼 것이다. 120여년 전 동학농민혁명이 그러했듯이, 그날처럼 허망하게 당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옥천 코뮌’을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