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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단 Jul 04. 2024

풀뿌리 민주주의의 민낯

연말연시 이장 선거 때가 다가오면 마을은 한바탕 몸살을 겪는다. 어쩌면 ‘몸살’이라도 겪는 마을은 그나마 나은지도 모르겠다. 마을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연임 제한이 없는 마을의 어떤 이장들은 수십년간 이장직을 직업처럼 맡기도 한다. 정말 잘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할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작은 독재로 흐르는 경향도 없지 않다. 이장의 권력은 마을 안에서 결코 작지 않다. 마을의 말 안 듣는 한 사람을 ‘왕따’시키고 쫓아내는 데는 작지 않다. 마을 사업과 기금을 홀로 유리하게 편취하는 데는 결코 작지 않다.

조용하고 작은 독재는 이끼처럼 티가 나지 않는다. 마을의 대외활동은 이장을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면 지역 유지와 단체, 공공기관과 관계가 돈독한 이장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을은 위장된 평화를 구가한다. <전원일기>에 나오는 마을처럼 평안하고 정겹게 보고 싶어하지만, 속내를 보면 ‘질색팔색’을 하고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을도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잠깐 마주친 사람들의 친절에 혹해 땅을 사고 귀농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을 일을 조금 겪어보고는 줄행랑치듯 도망가는 사례를 여럿 봤다. 어떤 마을은 5년 동안 살고 300만원의 마을회 가입비를 내야만 이장 선거권을 주기도 한다. 어떤 마을은 이장이 집 앞 순환도로를 자기 물건을 거치해 놓는 주차장과 창고로 막아놓아서 아예 순환도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 어떤 마을은 이장 선거 26시간 전에 마을 방송으로 통보를 하고, 마을 거주민은 200가구 남짓 되지만 20명만 넘으면 총회가 성사된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횡행하는 곳이 또한 마을이다.

군 행정은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현재 이장은 보통 마을에서 선출하는 자치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읍면장이 임명하는 ‘반자반행’의 묘한 제도이다. 행정이 임명을 한다면 일정 정도 책임은 있을 텐데 마을 일에 분란과 갈등이 생기면 쏘옥 빠져서 방관자가 된다. 괜히 진흙탕 싸움에 껴들었다가 엮여서 피를 보는 경우를 여럿 봤기 때문에 ‘복지부동’하는 것이다. ‘마을 일은 마을에서 알아서 하라’는 거창한 자치적인 명분(?)도 여기에 들어 있다.      

행정이 방임하는 사이, 마을 주민들은 불과 10미터도 안 되는 이웃이면서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내용증명이 서로에게 발송되기 시작한다. 갈등을 풀 수 있는 완충지대는 없다. 분란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원칙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공간도, 기구도 없다. 이웃 간 왕래가 사라지고 내용증명이 오가고 법적 송사와 경찰 출두가 일상화된 마을에서 사는 건 한마디로 지옥이다. 각종 사업을 받고, 마을 기금이 어느 정도 생기기 시작하면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어떤 마을은 누군가 형사 구속되기도 한다. 파벌과 패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사는 마을의 약자들은 도무지 숨쉴 곳이 없다. 변두리 마을은 나이 든 할머니들만 있어서 도시에서 방탕한 짓을 하고 돌아온 탕아가 ‘이장을 맡겠다’ 공언하고 맡아버리면 ‘끝’인 경우도 많다.

행정의 지나친 개입은 자치를 훼손할 수 있다. 그런 우려는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제대로 마을 자치와 풀뿌리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공론장과 원칙과 상식을 지켜주는 행정은 필요하지 않을까? 법적 송사까지 가지 않도록 조정 역할을 행정이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면 단위 지역협의체가 있어서 마을 일까지 조정·조율한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시골 농촌에서는 다른 마을 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사실 금기시되어 있다. 자치와 방임 사이, 그 간극은 정말 크다. 자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원칙과 상식을 지켜낼 수 있는 행정의 최소한의 매뉴얼이 존재해야 한다. 자치를 훼손하지 않는다면서 방임하는 그 행정은 결국 풀뿌리 민주주의를 갉아먹는다. 그리고 행정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만든다. 마을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치열한 갈등과 세력다툼, 부조리와 비리가 난무하는 곳일 수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민낯을 보고 성찰하는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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