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02년 4월을 기억합니다

by 권단

#1.2002년 4월을 기억합니다. 지역신문 기자가 되고 싶어 그 때 당시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던 옥천에 선뜻 와서 면접을 봤던 때가 아련합니다. 같이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던 조주현 전 편집국장과 김석배 전 총무국장이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옥천에 와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지요. 주민들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습니다. 빨간 줄을 치면서 한줄한줄 읽어가고 신문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일주일 내내 붙잡고 기사를 읽는 모습은 저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구독이 자발적으로 들어오고, 배달된 신문이 없어지면 득달같이 전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2.하지만, 힘들기도 했습니다. 매주 돌아오는 마감과 기사에 대한 항의와 시시각각 조여오는 긴장감은 피를 말리게 했죠. 그래서 10년째 되던 해에 신문사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연고도 없는 옥천을 그 때 떠날까도 잠시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상한 자장이 저를 옥천에 붙들어 맸습니다.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이, 써온 기사들이, 천착한 이슈들이 옥천에 주저앉게 했습니다. '기자'완장을 떼고, '기사'가 되어 트럭을 몰며 학교급식 배달을 했습니다. 또한 노인장애인밑반찬 배달과 영양플러스 배달도 해봤습니다. 10년 째 하던 그 해, 사실 이쯤 했으면 옥천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을 테고 왠만한 것은 다 꿰고 있다는 오만과 자만이 있었습니다. 머리 쓰는 일이 아닌 몸을 쓰는 일을 하고 기자 완장을 떼고 주민으로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리고 매번 가던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가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3.옥천에도 못 만나본 사람이 안 가본 곳이 수두룩 빽빽하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된거지요.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자각이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산속 창고같은 집을 개조해 사는 독거노인, 엘레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빌라 꼭대기 층에 사는 다문화가족, 집에만 웅크려 있었던 장애인 등 호명하기도 미안해지는 지역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들을 열심히 만나지 못했다는 자성이 문득 들었습니다. 반성했지요. 들어가면 더 잘해야 겠다. 사실 그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였습니다. 옥천에 100만원대 미만 소득자가 34%에 달한다는 통계 수치를 접했을 때 끝간데 없이 떨어지는 생각의 심연은 깊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이들에게 얼마나 마이크를 가져다 주었는가. 목소리를 공론장 위에 올려 놓으려고 노력했는가. 마감 시간에 바빠,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속에 헤어나오지 못해 미처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것 아닌가. 무슨무슨 날에 특별 기획으로 잠깐잠깐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찾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4.신문사를 그만두기 전에 청산면에 이사 가서 3년 동안 살았던 기억도 또렷합니다. 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었지요. 읍이 아닌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청산고등학교 옆에 과수원 집을 얻어 청산면 신규 공무원과도 같이 살면서 지역에 대한 여러 고민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차로 40분 남짓한 거리를 부러 출퇴근을 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학생들과 같이 아침에 축구도 하고, 금요일 저녁마다 영화도 보고 공부방도 차려 야자가 끝나면 비빔밥도 비벼먹고 그랬지요. 청산초등학교 야간도서관 개방도 주민들과 같이 열었고 벼룩시장을 함께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많이 도시화 된 읍과는 달리 면의 삶은 또 달랐습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형제 자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저도 모르게 청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며들더군요. 궁촌재를 넘어오며 이사 올 때 눈물이 다 났습니다. 역시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청산면의 느티나무 같았던 박약국의 박명식 약사님은 저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셨지요. 아픈 몸으로 청산중학교 통폐합할 당시에도 꼿꼿하게 서서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5.배달 기사를 하면서 3년, 청산면에서 3년의 생활은 제가 옥천에서 값지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안남면 주민들과 이런 저런 자치활동에 더부살이를 하며 지켜본 것도 저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요. 배바우작은도서관이 2007년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운영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탰다는 것은 저의 작은 자부심이었습니다. 안남어머니학교와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를 취재하면서 주민들의 자치활동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제 어느덧 20년 가량이 지났습니다. 옥천신문 32년 역사 중에 저도 절반 이상을 함께 해온 것이지요. 저를 안에서 밖에서 이끌어주셨던 오한흥 대표님이 퇴임하시고 이제 제가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직 미약하고 많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옥천 안에서 만날 사람이 많고 가볼 곳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6.그리고 저와 같은 길을 따라오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옥천은 유구한 언론의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 청암 송건호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옥천을 언론과 미디어의 고장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수많은 미디어 청년 활동가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커뮤니티 저널리즘과 미디어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곳으로 가꿔 나가고 싶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청소년기자단과 옥천저널리즘스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32살 옥천신문에 조금만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더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활착할 수 있도록 마을과 지역을 지키는 든든한 느티나무가 될 수 있도록 주민과 독자 여러분들이 마음을 보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7.옥천신문이 주민들의 목을 축여주는 '말의 우물'이 될 터이고, 배 고플 때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글의 곳간'이 되겠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악귀가 좌지우지 않도록 말과 글을 밑바닥에서 지키는 친구가 되겠습니다. 지역의 새로운 '미디어 플랜'을 짜겠습니다. 소외된 이 없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마이크가 돌아갈 수 있도록 기울어진 공론장을 바로잡는데 힘쓰겠습니다. 지역을 한땀한땀 기록하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되기 위해 더 뛰고 더 다가가겠습니다. 2021년 9월 옥천신문의 32주년 창간을 다함께 축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잘 모르겠다. 이렇게 가도 되는 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