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다음으로 귀한 주례 말씀이 있겠습니다. 오늘 주례를 맡아주신 왕호평 선생님은 신랑 신부의 고등학교 은사이자, 최근까지 문학중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한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덕망 높은 교육자십니다.
주례: 에…… 오늘 이렇게 오독자 군과 나필자 양의 결혼식을 찾아주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하여 모든 분들이 무한한 기쁨으로 이 자리에 오셨겠지만, 옛 제자들의 주례를 맡게 된 저 또한 감개무량한 마음 감출 수 없습니다. 신랑 신부는 제가 담임을 맡았던 같은 반 동창 사이입니다. 제가 워낙 제자들을 사랑으로 길렀더니 저희들끼리도 이렇게 사랑을 하게 되었네요. 허허허. (좌중 억지웃음) 흔치 않은 인연 덕분에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두 집안의 결합이자 인륜지대사인 혼인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습니다만, 짧게 딱 5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오산 오씨 가문의 오대독자로 자란 오독자 군은, 소년 시절부터 총명하고 영민하며 독서를 매우 좋아하던 우등생이었습니다. 문장력 또한 출중하여, 독후감 하면 오 군을 따를 사람이 없었지요. 그 재능을 살려 지금도 국문학 전공 박사 과정을 성실히 밟고 있다 하니, 앞으로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젊은 인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에또…… 나필자 양은 제가 국어 선생을 지내는 동안 유례가 없을 만큼 기발한 상상력과 놀라운 필력을 가진 문학소녀였습니다. 오독자 군이 독후감 대회를 휩쓸었다면 나필자 양은 백일장을 휩쓸었지요. 그때부터 아마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필자 양은 현재 유능한 논술 강사로 일하며 재능을 펼치고 있으니, 이 역시 기특하고 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면 먼저, 두 사람의 혼인을 축복하며 이 자리에 걸맞는 축시를 한 편 낭송하겠습니다.
(이하 생략)
글_ 하객3
문학고등학교 3학년 2반 출신인 나필자와 오독자의 결혼 소식을 듣고, 우리 동창들은 모두 기겁했더랬다. 고교 시절 두 사람은 그야말로 개처럼 싸우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훗날 본인들은 ‘서로의 지성과 감성을 치열하게 다투던 사이’였다고 미화했다) 칠판의 <떠든 사람> 밑에는 언제나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들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것이……
그들에게 단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면 둘 다 클리셰라면 질색팔색하곤 했다는 사실이다. 오독자가 나필자의 글을 ‘흔한 소재’나 ‘뻔한 전개’라고 까면 나필자는 열이 받아 죽일 듯이 덤비곤 했다. 그토록 새로움만을 추구하던 두 사람이 ‘친구에서 연인으로’ 클리셰를 몸소 실천했다니 이 아니 놀랄 일인가.
두 사람이 왕호평 선생에게 주례를 부탁한 것은 더더욱 뻔한 전개요 또한 최악의 전개로 보였다. 선생은 일분 일초가 아깝던 고3 시절에도 조례 종례에 꼬박 20분씩을 할애하던 인물이다. 우리 2반 동창들은 단체카톡으로 장시간 논의한 끝에, 모두 30분씩 지각해 사진 찍고 밥만 먹고 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나는 왕 선생의 주례사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시간에 맞춰 식장에 들어서는 일생일대의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앞에 소개한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축시는 본인이 직접 창작한 장시였고,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을 이토록 훌륭하게 키워낸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결혼이란 무엇인지,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덕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결혼식을 치르는 오늘의 날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등등에 대하여 무려 30분에 달하는 설교를 하는 통에 예식장 관계자가 쪽지를 전달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그 고통을 독자와도 나누고 싶어 여기에 주례사 전문을 싣고자 했으나, 보르헤스의 조언에 따라 그런 짓은 그만두기로 한다. 다음의 인용은 순전히 있어 보이기 위함이다.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역, 민음사, 2011, p.10)
뿐인가? 왕 선생이 나필자에 대해 기발한 상상력과 놀라운 필력 운운한 대목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왕 선생은 나필자의 창작 활동을 방해했으면 했지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필자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온 날은 종례 시간 내내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수업시간에 몰래 쓰던 19금 팬픽을 빼앗아 큰 소리로 낭독하거나, 낭독한 뒤 찢어버리거나, 찢은 뒤 차디찬 경멸의 말을 던지거나 하는 등의 만행 역시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왕 선생은 나필자가 ‘상 받는 글’만 쓰기를 원했다. 그녀가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논술 강사를 택한 것은 아마 왕 선생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물론 박사 과정생인 오독자를 먹여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겠지만.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필자는 그 주례사를 듣는 동안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대체 왜 왕 선생에게 주례를 부탁했는지. 정말 그것은 ‘뻔한 최악의 전개’에 불과했는지.
근거 없는 예측을 해보자면, 아마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왕 선생의 과찬과 폭언은 결국 꼰대의 장광설에 불과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하여. 이제는 자신이 그러한 장광설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는지 시험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앞으로 평생 감수해야 할 남편 오독자의 시시콜콜한 비평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길을 걷기 위하여.
너무 과한 해석일까? 그러나 정말 이러한 목적으로 부탁한 주례라면, 이는 주례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나필자는 충분히 저런 생각을 해낼 만한 엉뚱함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로서는 그녀가 하루빨리 왕 선생으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다시 창작을 시작하길 바랄 따름이다. 나는 그녀가 쓴 19금 팬픽의 오랜 팬이었으므로.
사족1) 제 글에 대한 주례사 비평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제 멘탈은 소중하니까요. 큽……☆
사족2) 첫 연재글에 언급한 대로 <계간 쓰는사람> 시즌1 ‘형식적으로 쓰는 사람’은 8회짜리 연재물이었습니다. 다음주부터 잡지 발간 전까지는 다른 주제의 글들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