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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Feb 15. 2016

국영수와 컬러링북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 본문 인용이 있으나 딱히 스포일러는 아님


   나는 가끔 병에 걸리곤 한다. 그것은 바로,

   영어병과 수학병.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뜬금없이 영어공부를 하거나 수학 문제를 풀고 싶어진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어언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태 국영수의 굴레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고 한용운 시인은 노래했는데 참고서의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의 ‘당신’은 연인이나 조국, 부처를 뜻하지만 나는 고작 입시 주요과목 따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영어와 수학이라는 학문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매번 충동구매와 작심삼일로 끝나니까 문제지.

   어른으로 살기가 피곤할 때면 잠시나마 학생 시절의 답 있는 공부와 단순한 생활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보다 더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서점가를 점령한 컬러링북, 라이팅북을 보라. 색칠공부며 글자 따라 쓰기며, 죄다 어릴 적에 하던 일들이다. 어른을 위한 줄 긋기, 종이 오리기 책도 나오는 걸 보면 앞으로는 성인용 송곳모자이크북이나 종이인형 옷 입히기 따위가 히트를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라이팅북이 유행하기 한참 전에 「토지」를 2부 초반까지 필사하는 기염을 토한 적이 있다. 스프링노트 열 권 분량이었다. 그러고도 글솜씨가 그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지요. 허허. 솔직히 문장 공부를 위한 필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멋진 글을 베껴쓰다 보면 내 글이 안 써진다는 사실은 잠시 잊게 된다. 다분히 도피성이었다는 얘기다.

   ‘무의식적 표절’이 두려워서라도 필사는 다시 할 생각이 없지만, 영어와 수학은 아직도 종종 나를 유혹한다. 며칠 전에는 잠실교보까지 가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The price of salt」를 샀다. 물론 나는 원서를 읽을 능력이 없지만, 지르는 순간만큼은 꼭 읽고야 말리라는 의욕에 불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전에, 정확히는 두 장째에 덮고야 말았다. 포기한 건 아니다. 훗날을 기약할 뿐.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 다음으로 집어든 책이 하필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었다. 주인공인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고 나는 예감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분명 ‘그놈의 수학병’이 도지겠구나.


   그것은 수학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제 중 하나였다. ‘평면 또는 구면상의 모든 지도는 네 가지 색으로 칠해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 증명한 사람은 일리노이 대학의 케네스 아펠과 볼프강 하켄인데, 두 사람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든 지도가 약 150종류밖에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모든 지도를 사색으로 칠해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6년의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완벽한 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고 이시가미는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종이와 연필로 문제를 풀려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방식은 인간이 수작업으로 조사하기에는 너무 방대해. 그러니 컴퓨터를 수용했을 테지만, 그 덕분에 그 증명이 옳은지 그른지를 완벽하게 판단할 수단이 없어. 확인하는 데도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진정한 수학이 아냐.”
   “역시 엘데슈 신자로군.”
   장발은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폴 엘데슈는 …… 좋은 정리에는 반드시 자연스럽고 간단한 증명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4색 문제에 대해서도, 아펠과 하켄의 증명이 아마 옳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증명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했다. (110~112쪽)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고2때였는지, 수리영역 모의고사가 유난히 어려워 주관식 답을 몽땅 0이나 1 따위로 찍었더랬다. 어떤 문제는 에라 모르겠다, 당시 내 출석번호인 41을 써넣기도 했다. 그런데 채점을 한 결과 (두구두구두구) 맞힌 문제는 단 하나, ‘41’이 아닌가!!!!! 느낌표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것만은 느낌표 다섯 개가 아깝지 않은 기적이었다. 41 하나를 맞히기 위해 나는 최씨로 태어나 그 반의 마흔한 번째 성씨가 되었던가.

   다시 말해 나는 결코 수학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문과와 이과를 정할 때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문과를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 증명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이해가 된다. 어려운 문제의 간단한 해법을 발견하고 엄청난 희열을 느낀 적이 아주 매우 몹시 드물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수학이란 내게 끊임없는 희망고문이었으니,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가 수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저런 장면을 보면 또 한 번 어리석은 충동구매를 강행할 수밖에.

   4색 문제를 직접 증명하는 건 백 번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하겠지만, 모든 지도를 4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로웠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색연필 네 자루만 있으면 같은 색깔이 경계선을 공유하지 않도록 칠할 수 있다는 얘기 같았다. 직접 지도 비스무리한 걸 그려 색칠해보기로 했다. 쓸데없는 짓은 참 잘한다.



   뭐지 이건……? 형태가 심히 괴상하지만 최대한 복잡한 지도(??)를 그리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이 밑그림 그려진 컬러링북을 사는지 알겠다. 나름 정성스레 색칠을 끝마쳤는데도 힐링은커녕 싸이코가 된 기분이다. 부디 이 그림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분은 없기를.

   한데 이상하다. 두 번째 그림 귀퉁이에 빨간색으로 칠한 부분은 남색, 회색, 하늘색, 보라색 다 안 되는데? 이렇게 막 칠하는 게 아니었나? 특수한 방법이 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일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아펠과 하켄은 그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그래프에 존재할 수 있는 1,936가지의 '필연적인' 배치에 관한 목록을 작성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이러한 각각의 배치들이 어떻게 보다 작은 배치로 감소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그 결과 만약 보다 작은 배치가 4가지 색으로 칠해진다면, 원래 목록의 조합 역시 4가지 색으로 칠해질 수 있다. 따라서 4가지 색으로 칠해지지 않는 지도가 있다면, 그들의 목록을 이용하여 역시 4가지 색으로 칠해지지 않는 더 작은 지도를 계속해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계속 감소시키면, 결국 4가지 색으로 칠해지지 않은 3개 혹은 4개의 지역이 그려진 지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4가지 이상의 색을 필요로 하는 지도가 존재한다는 가설하에 유도된 이러한 불합리한 결과는 결국 그러한 지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여?

   분명 한글이고 어려운 단어도 없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번역이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아마도 내 이해력이 문제겠지…… 정녕 이런 글을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그런 사람의 뇌구조는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될까? 역시 수학은 기초부터 해야겠지? 내 수준에는 몇 학년 교과서가 맞을까? 중1? 중2? 설마 초등?

   서점으로 달려가기 전에 서둘러 마무리부터 해야겠다. 유명 작가의 대표작인 만큼 이미 읽은 분도 많겠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은 수학이 다가 아니다. 잊지 못할 캐릭터와 충격적인 반전도 있고 특히 결말은 말할 수 없이 먹먹했다. 혹시라도 자녀의 수학 성적 향상을 위해 이 책을 선물하려는 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어 추리소설 매니아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랄 땐 안 하고 하지 말랄 때 하는 게 취미생활의 참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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