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요…… 절대로 안 뽑힐 자소서를 써보고 싶어졌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래요…… 죽어라고 열심히 써도 안 뽑히긴 마찬가지겠지만…… 어차피 안 뽑힐 거니까…… 솔직하게 써보자…… 아니 실컷 거짓말을 해보자…… 그냥 막 써보자…… 막 나가보자…… 막 살아보자…… 어차피 아무도 안 볼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요……’라는 첫 문장, 아니 첫 어절만 보고도 당신은 이 자소서를 내던져버렸겠죠…… 자신감 없고 무기력한 데다 즉흥적이기까지 한 직원은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말끝을 흐리는 저런 태도…… 싫어하겠죠…… 그런데요…… 저런 식으로 첫 문장을 쓴 사람은 나뿐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뿌듯하기도 하네요…… 뿌듯한 감정, 참 오랜만이에요……
입사할 리는 없지만 ‘입사 후 포부’라는 항목이 있으니까…… 써보긴 써볼게요…… 기적이 일어나서…… 전산오류라도 나서 합격 통지를 받게 되면…… 얼굴에 점이라도 찍고 출근해볼까 싶어요…… 그럼 아무도 못 알아볼 거 아녜요…… 예전에 귀사에서 6개월 계약직으로 일했던 애라는 거…… 다섯 명 중에 한 명 정규직 시켜준다고 해놓고…… 결국 다섯 명 다 깔끔하게 계약만료로 나왔죠…… 서로 일등 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했는데…… 점 찍고 다시 입사하면…… 이번엔 다른 계약직들 바닥 깔아준다 생각하고…… 널널하게 다닐래요…… 널널한 직장생활…… 요즘 세상에 그만큼 원대한 포부가 어딨겠어요……
성장과정이라…… 뭐, 많이 떠돌아다니면서 성장했죠…… 아버지가 외교관이시거든요…… 덕분에 중국어, 포르투갈어, 영어에는 능통하지만…… 여행이라면 학을 떼게 됐어요…… 그저 집에서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캐나다 살 때 유화를 좀 배웠는데…… 선생이 큐레이터 지망하는 대학원생이었거든요…… 그 사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하이스쿨 때 현대미술 동아리도 만들고 그랬어요…… 애들이랑 학교 강당에서 전시회도 열고…… 하…… 거짓말하기도 어렵네요…… 아무래도 이런 인생은 상상이 잘 안 돼서……
그런데 진짜 성장과정에 대해선 할 말이 더 없어요……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자랐는데 어쩌죠…… 물론 모든 면에서 평범한 건 아니었지만…… 시시콜콜한 집안사정까지 털어놓고 싶지는 않네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평가하면 됐지…… 왜 우리 가족들 얘기까지 캐묻는 건데요…… 그냥 선량한 부모님 밑에서 적당히 잔소리도 듣고…… 머리 커서는 싸우기도 하고…… 주말이면 거실에 나란히 누워서 텔레비전 보고…… 그랬어요…… 그나마 그것도 옛날 일이네요…… 부모님이 원래 조그만 슈퍼 하나 하시다가…… 한 오륙 년 전에 편의점으로 돌렸거든요…… 그때부터 세 식구가 돌아가면서 편의점 지키느라…… 교대할 때나 얼굴 보는 사이가 됐어요…… 처음엔 정말 병원처럼 3교대로 스케줄표를 짰다니까요…… 모닝, 이브닝, 나이트로 나눠서요…… 온 가족 소원이 알바 쓰는 거였는데…… 요새는 점점 더 장사가 안 돼서…… 부모님이 2교대하시고 저는 다른 편의점에서 알바해요…… 우리 가족은 편의점을 위해서 생겨났나 싶어요……
신중하고 생각이 깊으며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 이게 제 자소서용 장점인데 사실 뻥이에요…… 신중한 게 아니라 느려터진 거고…… 생각이 깊은 게 아니라 잡생각이 많은 거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하기 귀찮아서 잘 듣는 척하는 거예요…… 단점은 많아요…… 우울한 거…… 상처 잘 받는 거…… 용기 없는 거…… 열정 없는 거…… 다 치명적인 단점인 거 알지만…… 긍정적이고 멘탈 강하고 용감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으로 바뀌고 싶지는 않네요…… 그런 사람은 왠지…… 너무…… 효율적이니까…… 너무…… 당신들이 원하는 인간형이니까…… 내가 그렇게 백팔십도 달라지면…… 성형외과의 비포 애프터 사진처럼 적나라하게…… 이용될 것 같아서…… 그러면 이전의 나도 이후의 나도…… 둘 다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경력도 귀사 계약직과 편의점 알바뿐이고…… 유별난 경험도 특기도 없네요…… 아, 하나 기억나요…… 문예반 반장 몇 번 했던 거…… 시 쓰겠답시고 폼 잡고 다녔던 거…… 철없을 때 일이죠…… 이젠 안 써요…… 시뿐만 아니라 쓴다는 것 자체가 지긋지긋해요…… 사실 글 잘쓴다는 말 많이 들었었었거든요…… 언젠가 한번은 큰맘먹고 유서를 썼는데…… 글 잘쓴다더라고요…… 부럽다더라고요…… 대학교 과동기였는데…… 걔는 글 못쓰는 게 콤플렉스여서……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공무원 됐죠 뭐…… 한 사수쯤 했던가…… 시골 가서 잘먹고 잘살아요…… 어르신들 얘기도 많이 들어드리고…… 농번기엔 농사도 돕고…… 공기 좋은 데서 웰빙하더라고요…… 걔 성공할 동안에 저는…… 유서를 열댓 번쯤 퇴고하고 나니까 지겹기도 하고…… 고치면 고칠수록 더 엉망이 돼서…… 내 인생 마지막 글인데 이따위로 써서는…… 남한테 보여주기도 쪽팔리고…… 그냥 포기하고 깔끔하게 죽어도 됐겠지만…… 포기도 못 하고…… 제가 좀 결단력이 없어서요……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이게 마지막 글이었으면 좋겠어요…… 읽혀지지는 않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