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응용마케팅학과 20XX803513 김순희
야심차게 시작한 독립잡지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목표액 120만 원에 모금액 13만 원, 달성률 10%. 와우! 이로써 나의 성공신화에도 ‘무모한 첫 도전과 뼈아픈 실패’라는 필수요소가 갖춰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게 내가 기획한 시나리오였……
기는 개뿔.
유쾌하게 ‘성공!’을 외치는 대다수의 프로젝트 사이에서 ‘무산’ 딱지를 붙인 채 자리만 차지하는 내새끼를 보는 심정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닭볶음탕 안주에 소주라도 퍼마셔야 마땅할 이런 날, 청양고추 팍팍 넣은 불닭볶음면을 흡입하며 문학개론 리포트나 쓰고 있는 신세라니.
모르겠다, 대충 쓰자. 인생 뭐 있나.
이번 과제가 뭐더라…… 그래, 이거다.
‘문학 형식과 내용의 관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루카치의 <미학>을 참조하여’
그야말로 ‘학’ 소리 나오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단풍의 잎맥과 가을 강의 물비늘을 읽기에도 모자란 가을날 이게 무슨 짓인가. 양심이 있는 건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루카치를 빌리지 않아도 형식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분량도 채울 겸, 내가 만들려던 <계간 쓰는사람> 창간예비호의 소개글을 인용해보련다.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내 소설을 아무리 고쳐도 1월 1일의 신문지면이나 대형출판사의 문학잡지에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서점 매대에 반듯하게 진열된 문학잡지들은 마치 묵직한 사기접시처럼 느껴졌습니다. 완벽하게 플레이팅된 고급 요리만 담겨야 할 것 같았달까요.
그래서 제가 직접! 새로운 잡지를 만들어 스스로 데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플라스틱 도시락통처럼 가벼운 잡지 말이죠. 달랑달랑 들고 소풍을 떠나고 싶어지는, 속에 든 김밥이 다 풀려 있어도 피식 웃으며 먹을 수 있는, 대충 만든 샌드위치도 잘 어울리지만 가끔은 서프라이즈 특별 요리가 담기기도 하는 도시락통. 계간 <쓰는 사람>은 그런 이미지에서 출발했습니다.
다른 그릇을 상상해내자 다른 메뉴들도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80매 내외에 맞춰 구상했던 소설의 틀을 벗어나 좀 더 가볍게, 좀 더 뻔뻔하게, 전과는 다른 형식의 글들을 써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략)
그동안 나는 등단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년간 하나의 형식에만 매달려왔다. 그 지긋지긋한 삽질을 때려치우고 처음 쓴 글이 저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은 넓고 매체는 다양했다. 등단 안 하고도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천지삐까리였다. 그걸 이제 알았냐고? 물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엄청난 양의 책들을 둘러볼 때마다 느꼈었다. 그렇지만 고시생이 취업시장 넓은 걸 몰라서 고시에 매달리는 건 아니지 않나?
내게는 몇백만 원의 상금과, 작가지망생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인정받을 최소한의 자격증명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돈과 자격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던가. 글쓰기의 즐거움, 내 글에 대한 자신감, 쓰고 싶었지만 유치하고 진부하다는 이유로 버려진 소재와 문장과 구성들.
어쨌거나 지금부턴 ‘개썅마이웨이’다. 먹고사는 일도 급했지만 일단은 놀기로 했다. 쓰면서 노는 건 자신 있었다. 놀다 보면 가끔은 놀라운 일도 생기기 마련. 아무리 쓸데없는 일도 쓸데없지만은 않기 마련. 스스로 내게 맞는 형식을 만들어보는 거다. 유치하고 만만한, 내 스타일의 문학잡지는 어떨까? 글쓰기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서 잠시 긴장 풀고 놀다 갈 수 있는, 그런 잡지. 놀 생각을 하니 수능 끝난 고3처럼 신이 났다.
그런데……
수년간 얽매였던 형식으로부터 뛰쳐나왔지만 형식은 어디에나 있었다. 잡지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펀딩 프로젝트 소개글을 쓸 때는 마치 ‘발랄하고 자신 있는 예술계열 대학생’이 되어 여러 사람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또다시 ‘을’이 된 느낌.
시스템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도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 큰 호감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저 당시의 내 감정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려는 것뿐이다.
을이 된 느낌따윈 기분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실패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실패는 내 탓인지도 모른다. 더 열심히 홍보를 하고 더 매력적인 비전을 보여줬더라면 나도 남들처럼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투자를 받아 자기 작업을 하려면 이 정도의 위화감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의식의 흐름이 왜 이토록 익숙할까.
나는 ‘신춘문예용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이내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형식으로 옮겨 갔고, 펀딩에 실패한 지금은 또 ‘브런치’라는 형식을 활용해 내 글들을 공개하려는 중인데, 이건 마치 끊임없이 다른 집을 찾아다니는 무주택자 같은 기분이다. 지긋지긋한 어떤 형식을 거부하는 방법은 다른 형식을 선택하는 것뿐일까? 늘 쓰던 사기접시에 질려 그릇 가게에서 새 그릇을 고르는 사람처럼. 또는 문화센터에서 도자기 공예를 배우며 자기만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처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쓰고 편집하고 디자인한 종이잡지 한 권을 만들고 나면 그것만은 온전히 나다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잠깐, 형식이란 정확히 무슨 뜻이지? ‘단편소설’이 형식이라면 ‘신춘문예용 단편소설’도 형식이라고 할 수 있나? ‘원고지 80매 내외의 진지하고 섬세하고 구성이 탄탄한 단편소설’도 형식일까? 어떤 형식의 글을 평가하는 기준은 누가 만드는 건가? 그 기준 자체도 형식 안에 포함된 것일까? 형식이란 시스템인가? 법칙인가? 방법인가? 스타일인가? 갑자기 모든 것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런 답 없는 의문에 빠지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과제를 내준 문학개론 교수, 국문과 강사를 거쳐 문예창작과 부교수를 역임한 뒤 언어응용마케팅학과 정교수가 된 그에게 질문하면 딱이겠지만 이 글은 픽션이고 교수는 가상인물이니 말이다. 아, 정녕 <시학>과 <미학>을 읽어야만 하는 건가? 거기에 플라톤의 무슨 책, 촘스키나 수전 손택의 무슨 책도 참고해야 하는 걸까? 인생은 짧고 가을은 더더욱 짧은데.
그런 어려운 문제는 다음 세상에서 천재로 태어나 풀기로 하고, 나는 쓰면서 노는 사람답게 지금부터 이런 놀이를 해보려고 한다. 이름하여 <형식적으로 쓰는 사람>.
대학은 학업 평가를 위해 리포트와 시험이라는 형식을 만들었고, 문단은 신인 발굴을 위해 신춘문예라는 형식을 만들었으며, 기업은 인력 채용을 위해 자기소개서라는 형식을 만들었다. 수많은 학생과 작가지망생과 취업준비생 들이 그 목적에 부응하여 주어진 형식에 맞게 쓰고 또 썼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학점과 무관한 리포트, 등단과 무관한 소설, 취업과 무관한 자기소개서를 써보는 거다. 지금 내가 문학개론 리포트에 엉뚱한 넋두리를 횡설수설 늘어놓은 것처럼.
현실도피라고, 정신승리라고, 한가한 장난질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웬만하면 그냥 재밌게 봐줬으면 좋겠다. 온통 뛰어나고 합목적적인 것들만 생산해내야 하는 세상이 갑갑하지 않나? 조금 전 확정되었다는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들이 국정교과서의 목적에 전혀 맞지 않는 글을 써낸다면? 교과서 예산은 날려먹겠지만 오히려 그편이 낫지 않을까?
워워, 국정교과서라니! 더 거창해지기 전에 서둘러 끝을 맺어야겠다. 엎어진 창간예비호를 뒤로하고 오늘부터 <계간 쓰는사람>의 본격적인 첫 시즌을 시작하려 한다. 지금 이 글처럼 별 쓸데없는 글나부랭이를 8주간 연재하고 종이잡지로 묶을 예정이다. 제작비가 없으니 쪽수도 판형도 줄여야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지 뭐. 창간호가 아니라 창간예비호를 말아먹어서 다행이다. 역시 난 얍삽했다.
최근 들어 새로운 형태의 문학잡지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세계의 문학>을 폐간한 민음사는 내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다채롭고 재미있고 세련된 새 잡지를 만들어낼 게 뻔하다. 하지만 돈도 재능도 없는 잉여로서 돈이나 재능으로 흉내낼 수 없는 잡지를 꼭 좀 만들어보고 싶다. 젠장 또 거창해졌네. 이것도 병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