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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Sep 07. 2022

최악인 시절과 미니홈피 다이어리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약스포

1.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봤다. 2021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북에서 찜해뒀던 영화다. 주인공 율리에는 끊임없이 '뭔가 더 좋은 것'을 찾으며 갈팡질팡하는 서른 살이다. 방황기에 만난 애인들과 함께 율리에는 더 매력적으로, 그리고 더더욱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많은 풍파를 겪은 끝에 로맨스 여주로서의 시기를 지나 자기 인생의 원톱 주인공이자 사회의 단역으로 자리잡지만, 왠지 그 성장이 씁쓸해 보였다.


확신 없이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좌충우돌하는 율리에의 불안한 모습이 참 안타깝고 공감도 됐다. 방황하는 사람은 비틀거리며 돌아가는 팽이처럼 어지럽고 아슬아슬해 보인다. 각자의 방황을 가진 팽이 두 개가 만나면 툭툭 부딪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은하계의 행성들처럼 영영 멀어지기도 한다. 영영 멀어진 다른 팽이들-악셀과 에이빈드-도 기억에 남았다.


2.

며칠 전 퇴근 준비를 하는데 핸드폰 알림이 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가 복구됐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이 덜컥했다. 올 것이 왔구나. 앱을 열어 다이어리 탭을 선택하자 10여 년 전의 달력이 나타났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중 한 날짜를 눌러 내용을 보는 순간... '아 XX' 나도 모르게 쌍욕이 튀어나왔다. 내가 최악이었던 시절이 직격탄처럼 안구를 강타한 것이다. 아차 하고 입을 막았지만 나는 아직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까? 모르겠다.


사진 따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판도라의 상자였다. 불에 덴 듯이 앱을 닫아버린 후 지금까지도 다시 읽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미쳤다 진짜. 내가 왜 그랬을까. 심지어 그 내용을 글로 써놓기까지 했다니! 아아, 정녕 방황하지 않고 나이먹을 수는 없는 것일까? 엉엉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3.

사족. 영화관 스크린에 꽤 큰 흠집이 있었다. 반대편에서 접시 모서리로 찍은 것처럼, 가늘게 툭 튀어나온 자국이었다. 처음에는 영화를 보는 데 방해가 됐지만 점점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장면에 따라 그 흠집은 능선 위의 UFO처럼 보였다가, 얼굴의 흉터가 되었다가, 나뭇잎 중 하나가 되었다가, 어둠 속에 사라지기도 했다. 내가 화가라면 저런 주제로 연작그림을 그려봤을텐데. 흠집이 단순한 결함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사진 출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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