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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Jan 15. 2023

빛 알갱이들이 트램펄린을 타는 세상

옷 쇼핑을 몹시도 싫어하는 나는 가끔씩 ‘아름다운가게’에 들른다. 퇴근길에 지나치는 위치라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고, 다른 옷가게들처럼 들어가면 꼭 사야 될 것 같은 느낌도 없고, 가격도 저렴해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괜찮은 옷을 발견했을 때는 득템의 쾌감도 있다. 누군가가 열심히 고민해서 샀던 옷들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믿음직하기도 하다.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색깔별로 옷을 분류해 놓는다. 흰 셔츠와 미색 스웨터가, 빨간 블라우스와 다홍 가디건이, 파란 니트와 하늘색 재킷이 끼리끼리 모여 있다. 마치 무지개색 팔레트처럼 보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총천연색 중에서 회색 옷, 갈색 옷, 청바지 쪽만 들춰보고 다른 색깔들은 그냥 지나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내 방에 있는 2단 왕자행거도 회색, 갈색, 파란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옷뿐만이 아니다. 이불도 수건도 회색으로 깔맞춤이다. 작년 템플스테이를 갔을 때 방 벽지가 아주 연한 회색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 취향이 되게 칙칙한 줄 알았다. 아주 심플한 회색 세상에서 살고 싶은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색깔을 되게 좋아하는구나?’


티 없이 탁 트인 하늘의 색깔. 반쯤 마른 잔디의 색깔. 초록 나뭇잎 사이 빨간 열매의 색깔. 노란색, 분홍색, 흰색, 자주색 꽃들의 색깔. 얼음이 짤랑거리는 투명한 석륫빛 찻물의 색깔. 모든 색깔이 매력적이었다. 지겨운 일상을 살다가 문득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저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보람은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색깔 덕분이 아니었을까? 색깔이란 게 없었대도 지금처럼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을까?


그랬다. 나는 알록달록한 색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칙칙한 보호색으로 최대한 나를 숨긴 채 느긋하게 앉아서 세상의 다채로운 색깔들을 실컷 감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취미는 결심, 특기는 작심삼일인 내가 어느 날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을 말 그대로 실천해보기로 결심했다. 작은 계획들을 세우고 하나씩 실천할 때마다 실에 예쁜 구슬을 하나씩 꿰는 것이다. 꿴 구슬이 늘어날수록 성취감이 느껴져 실천의 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종의 나를 위한 칭찬스티커랄까?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구슬과 실이 필요했다. 비즈공예 재료를 파는 동대문 종합시장까지 원정을 나갔다. 길을 헤매며 어찌저찌 A동 5층에 도착해 액세서리 부자재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휘황찬란한 별천지가 펼쳐졌다. 반짝반짝 영롱한 벼라별 색 구슬들이 눈앞에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눈이 획 돌아갔다. 홀린 듯이 한 매장에 다가가 구슬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 색도 예쁘고 저 색도 예뻤다. 이 색도 저 색도 포기할 수 없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간신히 나만의 구슬 팔레트를 완성했다. 아름다운가게에서 5천원짜리 옷을 사는 내가 구슬 값으로 5만원을 넘게 썼다. 이것이 바로 플렉스인가?


매장 전경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못 찍음-_- 이런 매장이 수십 곳이나 있다


물론 구슬을 칭찬스티커로 쓰자는 결심 또한 나의 수많은 결심들처럼 지켜지지 못했고, 그 많은 구슬들은 지금도 반투명 용기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꿰지 않아도 예쁘다. 이래서 내가 안 되는 걸까?


심혈을 기울인 구슬 콜렉션


색깔: 물체가 빛을 받을 때 빛의 파장에 따라 그 거죽에 나타나는 특유한 빛
노랑: 가시 스펙트럼에서 576~580nm 사이의 색이며 흰색 다음으로 밝은 기본색

물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비추는 빛이 없다면 색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색은 뇌에서 형성되는 감각이기 때문에 뇌의 작용과 동떨어져 외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색은 어떤 물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그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의 특정 파장 성분을 인간의 신경계가 인식하는 내용이다. 결국 색이란 어떤 물체에서 반사된 빛을 인간의 눈과 뇌가 받아들인 느낌이다. (최현석, 『인간의 모든 감각』, 서해문집)


색깔이란 것은 참 신기하다. 사람이 색깔을 인식하고, 각각의 색깔마다 다른 감정과 매력을 느낀다는 것도 신기하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원래 세상에는 색깔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단다. 어떤 물체에 빛을 비췄을 때 몇 나노미터의 파장을 반사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눈에 다르게 보이는 거란다.


문과인 내 머리로 비유해보자면 이렇다. 태양에서 엄청나게 작은 빛 알갱이들이 지구를 향해 와르르 쏟아진다. 모든 사물의 표면은 색깔이 없는 팽팽한 그물과 같은데, 파란 알갱이들은 트램펄린처럼 통 튀어오르고(나 어릴 때는 ‘방방’이라고 불렀다), 다른 색 알갱이들은 그물망 속으로 쑥 빠져들어간다. 그 결과 그 사물의 표면은 파란색으로 보이게 된다... 뭐 그런 뜻 아닐까?


엄밀히 말해 빛이 알갱이(입자)인지 파동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나는 과학자가 아니고, 파동보다는 알갱이가 왠지 더 귀여우니까 알갱이라고 치자. 지구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빛 알갱이들이 트램펄린을 타거나 다이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와, 역시 세상은 신기한 곳이다.


(...라고 써놓고 갑자기 우울해짐 주의)


대략 80여 일 전, ‘어딘가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느낌’이라는 글을 올려놓고는 그대로 달려나가 브런치 잠수를 타고 말았다. 세계일주도 할 수 있는 80일이란 시간 동안 난 뭐하고 살았던가.


‘일하기 싫다. 회사 가기 싫다. 나는 평생 이 모양 이 꼴일 것 같다. 내가 자유로워질 날은 안 올 것 같다. 오더라도 생각보다 잘 못 지낼 것 같다. 내가 해볼 수 있는 재밌는 일들은 이미 다 해본 것 같다. 내 인생 더는 나아질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잿빛 바탕색으로 깔려 있는 갱지 연습장에 가끔씩 재밌는 책, 재밌는 드라마, 웃긴 유머글, 멋진 풍경, 귀여운 펭수... 등등을 별모양 스티커처럼 몇 개쯤 애써 붙여보는 듯한 나날이었다.


아아 이 지겨운 바탕색을 바꾸고 싶다. 갱지 연습장 말고 하얀 스케치북에 내 맘대로 실컷 색칠하듯이 살고 싶다. 오랜만에 올린 글을 이렇게 또 징징대면서 마무리해본다.ㅋㅋㅋㅋ




p.s.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되도록 주1회는 올릴 생각이랍니다...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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