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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은 ‘내 시간 잘 보내기’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3)

by 이제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두 달쯤 지나 8번째 아날로그 휴일을 맞았을 무렵에는 독서와 글쓰기가 기본 일과로 정착됐다. 역시 나는 읽고 쓰는 데 끌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날로그 휴일은 ‘쉬면서 노는 학교’ 같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동화책으로, 시험을 망쳐 호되게 혼난 주인공에게 재벌회장 할아버지가 자유로운 학교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다. 이 학교에는 광활한 운동장을 비롯해 놀이터, 만화방, 오락실, 음악실, 화실, 극장, 수영장, 낙서실 등등 없는 게 없다. 어디든 가서 마음대로 놀다가, 공부하고 싶을 때는 과목별 선생님을 찾아가면 된다. 처음에는 난장판 그 자체였지만 놀기에도 지친 아이들은 점차 자기 꿈을 찾아 공부도 하고 위기도 이겨내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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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면서 노는 학교』(김자환, 대교출판)


오랫동안 이런 학교를 꿈꿨다. 지금은 무제한의 자유보다는 최소한 의무교육기간만큼이라도 삶에 꼭 필요한 지식·기술·태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뀌긴 했지만, ‘쉬면서 노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로망은 여전하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적어도 휴일만큼은 어디든 가서 마음대로 놀 수 있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활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 인생 전체가 나만의 커리큘럼 같다고 느낀다. 살면서 마주치는 문제들이 나를 위한 맞춤형 과제처럼 유용할 때가 많았다. 뭔가를 잘못해서 교훈을 얻었다든지, 글이 안 써져서 글쓰기 책을 많이 읽었다든지, 워커홀릭과 일하며 저렇게는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크고 작은 모든 경험이 인생이라는 긴 커리큘럼을 구성한다. 과제의 결과가 어떻든 경험 자체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삶에 도움이 되곤 했다.


쉬면서 노는 학교에서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커리큘럼을 만들어 나간다. 어떤 아이는 미술에 제일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떤 아이는 수학을, 어떤 아이는 체육을 가장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 전공을 가진 셈이다. 공부 못지않게 ‘우정’이나 ‘성장’도 중요한 전공이다.


학교를 벗어난 성인에게도 자기 전공이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시하며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쌓은 분야 말이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 어떤 사람은 건강에, 어떤 사람은 신앙에, 어떤 사람은 덕질에 가장 많은 관심과 시간을 투자한다. 학위가 없어도 농부는 농사가 전공이고, 출판한 책은 없어도 매일 글을 쓰면 글쓰기가 전공이다. 육아와 글쓰기, 운동과 재테크 식으로 복수전공을 가질 수도 있다. 여행이나 대청소 같은 단기 과정도 많다.


모든 시작은 입학이고, 모든 끝은 졸업이다. 글쓰기를 시작했을 땐 글쓰기 학교에, 공무원이 되었을 땐 공무원 학교에 입학한 셈이다. 직장을 학교처럼 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거친 수많은 학교들 안에서 다양한 세부과목을 수강하며 정보도 얻고 체험·실습도 하고 위기도 겪고 추억도 쌓았다. 특정 과목에만 몰두하기도 하고, 싫은 과목을 강제로 들으며 고생하기도 하고, 긴 방학을 보내기도 했다. 잘하던 과목을 한동안 멀리해 전보다 후퇴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인생이란 원래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의 연속’이라고 나 자신을 달랬다. 그리고 살다보면 앞뒤를 판단하는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일도 부지기수다. 앞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옆으로 가고 있었거나, 뒤로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한다.


인생 커리큘럼에는 비밀이 많다. 학습목표가 뭔지, 몇 학년짜리인지, 강사는 어떤 사람인지, 과제가 많은지 적은지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변화하는 선택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학교를 다니다가 인연이 다하면 졸업한다. 헤어지면 졸업이고 퇴사하면 졸업이다. 중도에 스스로 포기했거나 원치 않는 끝을 맞았더라도 졸업장이 나온다. 한 직장을 3개월 다녔든 30년 다녔든, 퇴사하는 순간 그 직장에서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졸업한 것이니 미련 가질 필요가 없다. 모든 과정을 다 마쳤을 때, 즉 삶이 끝나는 순간이 와야만 내가 어떤 커리큘럼을 이수했는지가 전부 드러난다.


만일 내가 20년 전 임용고사를 때려치우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인생 커리큘럼의 학사 담당자가 “자, 글쓰기 전공으로 첫 단행본을 내는 데 20년이 걸릴 거야. 20년 동안 하기 싫은 일도 실컷 해야 하고, 글이 안 써져서 괴로워하는 시간도 엄청 많을 거야. 20년 만에 겨우 출간할 그 책은 소설도 아닐 거고, 지금 네가 쓰려고 하는 그런 내용도 아닐 거야. 심지어 네가 네 돈으로 직접 만들어서 300부쯤 인쇄하는 독립출판물일 거야. 그래도 입학할래?”라고 말해줬다면 나는 과연 입학했을까?


(…………한참 생각해본다…………)


그래도 했을 것 같긴 하다. “네?!! 20년이요?!! 헐ㅠㅠㅠㅠㅠㅠㅠㅠ” 하고 나라 잃은 표정으로 며칠쯤 시무룩해 있다가, “할 수 없죠 뭐…… 이거 안 하면 또 뭐하겠어요”라며 등록을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 20년이 힘들고 지루한 과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이 헤맸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좋은 것들도 많았다……라는 한가한 소리는 역시 20년이 지난 시점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겠지.


하지만 글을 안 썼어도 어차피 20년은 지났을 텐데, 이왕이면 뭐라도 하면서 보내는 게 나았던 거 아닐까? 내가 태어나서 성인이 되는 데도 20년이 걸렸고, 부모가 신생아를 성인으로 키우는 데도 20년이 걸린다. 한때 ‘작은 재능은 신의 저주’라는 말에 백번 공감했지만, 훗날 ‘애매한 재능은 나를 이 세계에서 튕겨나가지 않게 잡아주는 중력이었다’는 글을 읽고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씨네21> 1479호). 그러게, 인생 뭐 있나? 대단한 재능은 없었더라도 뭔가 붙잡고 꼼지락꼼지락 재밌게 지내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어쩌면 내가 평생에 걸쳐 연구해 온 인생전공은 ‘내 시간 잘 보내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자유롭고 즐겁고 편안하고 뿌듯하게 보내는 법. 잘 쉬고 잘 놀며 나만의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 삶이라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제대로 누리는 법.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연구해도 지겹지 않은, 아무리 많은 어려움에 부딪쳐도 포기하기 싫은 내 전문분야다. ‘아날로그 휴일’이라는 과목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마음 내킬 때마다 하루씩만 출석하면 되는, 숙제도 시험도 없는 힐링 워크숍이다. 아직까지는 꽤 마음에 든다. 글쓰기만큼이나 오래 가져갈 전공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내 시간을 잘 보내려면 단 하루라도 화면을 꺼야 했다. 동화 『쉬면서 노는 학교』의 시간적 배경이 1990년대 초반이 아니라 2020년대였다면 어땠을까? 이 책이 출간된 당시에는 TV와 오락기는 있어도 스마트폰은 없었다. TV채널도 공중파 심지어 케이블 채널도 없이 공중파 방송뿐이었다. 자정이 되면 애국가와 함께 모든 방송이 끝났다. 쉬면서 노는 학교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줬다면, 알고리즘과 소셜네트워크, 범람하는 정보와 자극적 콘텐츠의 유혹을 이겨내고 꿈을 찾을 수 있었을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이라는 초강력 자석이 내 모든 주의력을 끌어당겨,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었던 다른 일들을 영영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린시절 가족과 소풍을 가면 돗자리에 엎드려 책을 읽거나, 하늘을 보다가 잠이 들거나, 버너에 고기를 구워 먹곤 했다. 흔한 은박 돗자리는 어디든 단숨에 소풍지로 만드는 마법의 양탄자였다. 돗자리를 펼치듯 가볍게, 힘들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여유와 자유를 누리고 싶다. 이런 방법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소풍처럼 가벼운 시간과 공간을 남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한적하고 자유로운 시간. 숙제도 없고 시험도 없으며 쫓거나 쫓길 일도 없는 공간.


한편으로는 내가 쓰는 이야기가 자칫 배부른 소리로 보일까봐 신경이 쓰인다. 결코 부자는 아니지만 어쩌면 나도 경제적·문화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어서 아날로그 휴일이라는 아이디어를 시험하고, 이 시간을 채울 취미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어크로스)은 ‘디지털 디톡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너무 바빠서 자기만의 시간이 전혀 없거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의존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들도 많다. 또한 디지털 산업 자체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의존을 유도하고 있으므로, 현대인의 집중력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다. 그러니 ‘이렇게 노력하면 해결될 거야!’라는 식으로 개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잔혹한 낙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용불안정, 긴 노동시간 등의 사회문제는 사람들의 우울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디지털 산업은 어마어마한 정보와 자극을 쏟아내, 사람들이 자아실현이나 깊은 인간관계, 사회문제 해결 등에 집중할 여력이 없게 만들었다. 또한 아무래도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많을수록 디지털 디톡스, 유기농 식단, 건전하고 다양한 체험·활동에 접근하기가 쉬울 것이다. 집중력의 위기, 자유의 위기란 매우 복잡하고 폭 넓은 문제다(위의 책, 233~236쪽 참고).


그렇다면 나는 이 글을 어떤 방식으로 써야 좋을까? 아날로그 휴일이라는 새로운 전공에서 피해갈 수 없는 과제다. 아직 해법을 찾지 못했고, 쓰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모두가 찬성하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기는 불가능하다. 글쓰기는 어떤 질문에 대한 내적 대화이고, 지금은 지금의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써나갈 뿐이다. 다만, 되도록 ‘이래라 저래라’가 아닌 ‘나는 이랬다’라고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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