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4)
토요일 하루에 책 세 권을 읽었더니 책멀미가 나는 듯했다. 그래서 다음 날은 ‘책도 없는 날’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이든 책이든 남이 만든 콘텐츠는 전부 차단하고 딱 하루만 살아보는 거다. 아무것도 볼 게 없으면 내가 과연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내게 될지 궁금했다.
……그 결과,
하루가 온통 ‘계획’으로 채워졌다.
일단 아침부터 이 책의 목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써놓은 일기를 훑어보며, 글로 쓸 만한 내용을 뽑아 책의 얼개를 짜는 작업이었다.
나에게 ‘목차 짜기 충동’은 고질병과도 같다. 아무리 열심히 글감을 찾고 순서를 정리해 표로 만들어도 딱 그때까지만 보람차고 희망찰 뿐, 그 다음부터는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목차에 넣을 땐 분명 재밌는 글감 같았는데, 막상 글로 쓸 때는 할 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목록으로 나열한 수십 개의 글감들이 수십 개의 숙제처럼 느껴지는 지경이 되면 대체 무엇을 위한 계획이었는지 회의감이 들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계획을 짜려고 드는 성미를 타고났다. 전체 그림이 한눈에 보이지 않으면 지도 없이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불안해진다. 얼마 동안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미션들을 달성해야 하는지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 이런 성향은 소설을 쓸 때 더 큰 문제가 됐다. 살아보기 전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인생과도 같이, 소설의 전개도 예측하기 어려우니까.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플롯을 짜놔도 막상 글을 쓰다보면 이야기가 부자연스러워지거나 엉뚱한 데로 엇나가기 십상이었다. 첫 부분만 써두면 캐릭터들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작가들이 제일 신기하고 부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여행을 갈 때 엑셀로 30분 단위 시간표를 만들어 부지런히 움직이는 타입은 또 아니다. 오히려 그랬다면 더 완벽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더 잘 실천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또 너무 게으르달까? 나에게 계획이란 울타리를 치는 작업과 비슷하다. ‘이 울타리 안에서 맘대로 놀아, 다 놀면 이 길을 따라서 집에 가면 돼’라는 식으로 가이드라인을 잡고, 그 안에서 안전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자꾸 목차를 만드는 이유도 글감이 바닥나는 위험을 예방하고 싶어서, 이만큼 많은 글감이 있으니 이대로만 쓰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키고 싶어서인 것 같다.
이런 성격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계획을 일종의 취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냥 계획 자체가 재밌어서 짜는 거라고. 계획의 대부분을 달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너무 후회할 필요 없다. 계획하면서 재밌었으면 된 거다. 내가 뭘 하고 싶은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고, 그중에 몇 개만이라도 실제로 해보면서 살았으면 된 거다. 이런 생각은 『여행 준비의 기술』(박재영, 글항아리)이라는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실제로 여행을 가든 못 가든 ‘여행 준비’ 자체가 취미일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이 신선했다.
가끔 피아노를 치고, 빨래를 돌리거나 밥을 먹은 것 말고는 열 시간 넘게 죽치고 앉아 목차를 짰다. 저녁이 되자 당연히도 지쳐버렸지만, 아직도 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심심풀이로 쭉 적어봤다.
브런치 글 한 편 쓰기. 아주 큰 그림 그려보기. 워크숍 시나리오 써보기. 운동 다녀오기. 피아노 8마디 진도 나가기. 대청소 계획 세우기. 그림책 콘티 짜보기. 50컷 만화 콘티 짜보기. 콩나물 심기. 종이신문 읽기. 남길 책 700권만 고르고 다 처분하기. 채식 도전. 노천탕 가보기. 춤·수영 배우기. 드로잉카페·도예카페·목공방 등 원데이클래스. 전시·공연 관람. 바다 가서 물놀이. 비행기 타고 멀리 가보기. 포토샵, 인디자인, 클립스튜디오 배우기. 책 표지 디자인. 코인노래방 가기. 액자식 TV커버 만들기. 트램펄린·놀이기구 타보기. 독립서점, 그림책도서관, 시도서관 가기. 꽃집에서 꽃 사오기.
이날은 이 정도로 그쳤지만, ‘하고 싶은 일 목록’은 수시로 늘어난다. 쓰고 싶은 책, 읽고 싶은 책, 배우고 싶은 분야, 가보고 싶은 여행지, 통달하고 싶은 외국어 등등. 게으른 내가 그걸 다 하려면 500년은 살아야 될 것 같다.
관건은 취사선택이다. 하고 싶은 걸 다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 몇 가지만 하면 된다. 사고 싶었지만 사지 않은 물건들이 있듯,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도 있듯, 반짝 하고 사라지는 꿈들도 있는 게 당연하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것도,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것처럼 소비·성과를 지향하는 사회가 부추긴 욕망일지도 모른다.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뭘까’라는 질문과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100가지가 뭘까’라는 질문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이유는 전부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작성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어떤 경험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왔는지,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내 꿈이 뭔지, 그 목록을 통해 짐작하게 된다. 그 일들을 하는 나를 상상하며 희망과 의욕을 느낀다. 그런 ‘꿈과 희망’이 내게는 중요하다.
이십대 초반 무렵, <두 사람>이라는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먼 훗날 무지개 저 너머에 우리가 찾던 꿈 거기 없다 해도, 그대와 나 함께 보내는 지금 이 시간들이 내겐 그보다 더 소중한걸’이라는 가사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인생의 목적은 꿈을 이루는 거 아니었어? 꿈을 찾지 못해도 그대와 함께라면 괜찮다니! 그런 사람도 있구나!
지금도 나는 사랑보다는 꿈을 지향하는 인간이지만, 꿈을 이루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생에 꼭 목적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꿈이란 꼭 ‘성공, 달성, 합격, 완성’해야 하는 특정한 결승점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있고 싶은 곳에서 머무는 시간,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과정 자체가 내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을 빼앗는, 나를 잊게 하고 내 꿈을 외면하게 하는, 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드는, 내 버킷리스트에 특정 상품을 끼워넣으려는 유혹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 속에서 내 삶의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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