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6)
해볼까, 말까. 해볼까, 말까. 저 의자에 앉아볼까 말까.
5미터쯤 떨어진 의자를 힐끔거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지하철에서 자기소개하기’ 미션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무시무시한 모험이 눈앞에 있었다. 한 사람이 자전거를 세우고 그 의자에 앉아 잠시 머물고 갔다. ‘나도 해볼까?’ 얼마 후 한 커플이 나란히 앉아 화려한 실력을 뽐내고 갔다. ‘역시 안 되겠어.’
그것은 다름아닌 길거리 피아노였다.
볕 좋은 3월말, 산책하기 좋은 계절을 맞아 평소 안 다니던 길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천변 샛길로 내려가 굴다리 밑에 들어서자 벽화로 꾸민 휴게공간이 나타났다. 그 끝에 피아노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누구나 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피아노를 멀찍이 마주보는 벤치에 앉아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가 신촌 한복판이라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러나 인적 드문 굴다리 밑이라면, 어쩌면 나도 쳐볼 수 있지 않을까?
내게는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대문자에 볼드체 ‘I’인 내가 과연 길거리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이 대체 왜 길거리 피아노를 쳐보고 싶은 걸까? 내향인의 철갑을 두른 나의 내면에도 이해할 수 없는 관종적 로망이 있었다. 얼굴 없는 작가로 살고 싶으면서도 때로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사인회를 하는 상상을 했다. 주민센터에서 취미로 한국무용을 배울 때는 외국 길거리에서 흰 수건을 나부끼며 살풀이를 추는 상상을 했다. 소규모 연기 워크숍에 딱 한 번 출석한 뒤 포기한 적도 있었다.
굴다리 밑을 지나가는 자전거와 행인의 수가 점점 늘었다. 이번엔 역시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리를 떴다.
호수에 도착하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나에게 좋은 날씨는 남들에게도 좋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유일하게 한산해 보이는 관광정보센터로 피신해 관광지도를 구경했다. 인파를 뒤로하고 집에 돌아가다 보니 서서히 저녁이 내렸다. 어둑해지기 직전의 파란 하늘에 둥근 달이 떠 있었다. 하얗고, 동그랗고, 멀고, 작고, 차가운 달. 저렇게 예쁜 것이 하늘에 떠 있다니 지구는 참 멋진 곳이다, 우주는 신기한 곳이다, 새삼 감탄하며 걸었다.
귀갓길에 또다시 피아노를 만났다. 다시 멀찍한 벤치에 앉았다. 2차 갈등이 시작됐다. 아직은 이용시간이 남아 있었다. 낮에 비해서는 인적도 드물었다. 쳐볼까 말까 쳐볼까 말까. 한 꼬마가 아빠와 함께 지나가다 건반을 쾅쾅 두들기며 장난을 치고 갔다. 아아, 역시 아이들은 자유롭구나. 너무 많은 생각도, 괜한 부끄러움도, 남들 앞에서는 잘 쳐야 한다는 쓸데없는 자존심 따위도 없구나.
어느 순간 행인이 뚝 끊기자, 잽싸게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봤다. 내 디지털피아노와는 타건감도 소리도 달라 당황스러웠다. 건반 크기조차 내 피아노보다 작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 앉았으니 뭐라도 쳐보기로 했다. 양손을 건반에 올려놓자 20년 전부터 손버릇처럼 쳐온 ‘월광’ 첫 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건반 저 건반 눌러보다 가까스로 첫 화음을 짚어냈다. 그리고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차분한 곡을 치면서도 머릿속은 야단법석이었다. ‘이 다음이 뭐였더라? 이 다음에 분명 헷갈릴 것 같은데! 아 틀릴 것 같다 으악 어떡해!’ 하고 속으로 연신 비명을 지르며 아슬아슬하게 쳐나갔다. 피겨스케이팅을 하면서 ‘더블 악셀’이니 ‘트리플 러츠’니 하는 고비를 연달아 맞닥뜨리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공포는 배가됐다. “너도 한번 쳐볼래?” 같은 말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기어코 손가락이 꼬여버렸다. ‘망했다 결국 망했구나’ 싶었지만 어찌어찌 더듬거리다 보니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허우적거리듯 끝까지 쳐냈다. 마지막 음을 2.5초쯤 누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재빨리 도망쳤다.
도망은 쳤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실수가 생각보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오래된 경계선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처음 도전할 일들이 있다니 좋지 아니한가? 집에 돌아가는 길, 밤은 더 짙어지고 달은 더 밝아져 있었다. 만취한 듯 휘청이던 내 ‘월광’과는 달리, 달빛은 호젓이 흔들림 없었다.
공무원이 된 지 겨우 반 년쯤 지났을 무렵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나 포함 대부분의 직원이 본연의 업무에 더해 자가격리자 관리를 맡게 되었다. 배정받은 자가격리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내사항을 전달하고, 집 앞에 찾아가 방역키트를 문고리에 걸어두고, ‘자가격리자 전담공무원 앱’과 불시점검 등으로 격리 이탈 여부를 확인하는 등등의 일이었다. 배정받는 자가격리자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 상황이 대체 언제 끝날지, 끝나기는 할지 알 수 없었다.
디지털 피아노를 산 것이 그 무렵이었다. 늘 갖고 싶었지만 몇 년이나 망설이다 긴급재난지원금에 힘입어 결심한 것이었다. 막상 사고 보니 왜 그렇게 고민했나 싶게 기뻤다. 비좁은 방에 겨우 끼워넣어 방문도 반밖에 못 열게 됐지만, 방에 피아노를 들여놨다는 것 자체가 내 자취인생에서는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내 삶에 음악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존재감 있게 눈으로 보였다.
세상의 여러 악기 중에 피아노를 제일 좋아한다. 한 음 한 음 맑고 또렷한 소리가 좋다. 음 하나하나가 별처럼 반짝이며 쏟아지고 굴러가고 튀어 오르는 것 같다. 땅굴처럼 낮은 음부터 하늘을 날듯 높은 음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것도 좋다. 여러 음을 동시에 짚어 풍부한 화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점도 좋다. 특히 건반을 두드리는 느낌이 좋다.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듯이 건반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딱 내가 누르는 대로,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정직하게 반응하는 건반들이 좋다. 그 악기를 나도 갖게 되다니!
처음에는 베토벤의 월광 1악장을 다시 익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내내 연습한, 내가 끝까지 칠 수 있는 유일한 곡이었다. 남들은 오랜만에 쳐도 손이 기억한다던데, 십여 년을 안 쳤더니 깨끗이 잊어버린 상태였다. 음 하나하나를 ‘도, 레, 미, 파, 솔, 라, 시’ 하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계이름을 적었다. 나쁜 습관인 건 알지만 뭐 어떤가?
어른이 되어 피아노를 치니 이거 하난 좋았다. 내 멋대로 쳐도 뭐랄 사람이 없다는 것. 치고 싶은 곡만 쳐도 된다는 것. 어릴 때 다닌 피아노 학원처럼 하농, 체르니, 소나티네, 부르크뮐러, 피아노 소곡집 5종 세트를 열 번씩 체크하며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고 딱히 들려줄 사람도 없으니 그저 나 혼자만 재밌으면 충분했다. 음치도 코인노래방에서 실컷 노래부를 자유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못해도 된다’는 사실이 뜻밖의 해방감을 줬다. 회사 일은 일이니까 잘해야 하고, 글쓰기는 잘하고 싶으니까 잘해야 한다. 그런데 피아노는 못 쳐도 괜찮았다. 시험도 없고 마감도 없으니 내킬 때만 조금씩 연습하면 됐다. 세월아 네월아 진도는 느렸지만 결국은 월광을 다시 완주하게 됐다. 마음같지 않은 내 손가락이 답답하긴 해도, 칠 줄 아는 곡이 하나뿐이어도, 나름대로 기분은 낼 수 있었다. 우울할 땐 무겁게, 즐거울 땐 신나게, 화날 땐 와장창창 마음대로 두드렸다.
학원을 기웃대기 시작한 계기는 베토벤의 ‘비창’ 1악장이었다.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어려운 곡에 꽂혀 반 년쯤 혼자 연습하다 한계를 만난 것이다.
집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성인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가볼까 말까 밖에서 서성대기만 몇 달. 마침내 용기를 내 쭈뼛쭈뼛 들어가보니 금빛 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에 주눅이 들었으나 이왕 들어온 거 어쩌겠는가. 상담을 받아봤다. 학원비는 예상보다 비쌌지만 밤 11시까지 연중무휴로 연습실을 이용할 수 있는 점이 끌렸다. 힘들게 돈 벌어 이 정도는 날 위해 써도 되지 않을까? 할인가로 사둔 지역상품권으로 3개월 등록을 했다.
수강증을 받자마자 연습실에 들어가봤다. 비좁은 방에 오직 피아노와 나뿐이었다. 평범한 현실을 살다가 갑자기 옷장 속 딴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조심스레 건반을 눌러보고 움찔했다. 소리가 너무 컸다. 디지털 피아노와 업라이트 피아노는 여러모로 딴판이었다. 아무리 살살 쳐도 옆방에서 다 들릴 것 같았고, 실제로도 다른 방에서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음 페달을 밟은 채로 예의 월광 1악장을 살금살금 쳐봤다. 앞으로 여기서 편하게 연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더 큰 고비는 레슨이었다.
첫 레슨이 취업 면접보다 더 떨렸다. 혼자서만 연습하던 곡을 남에게 들려주는 것만도 긴장되는데 심지어 상대가 음대 나온 사람이라니, 내 연주(?)가 얼마나 얼토당토않게 들릴까! 피아노는 취미니까 잘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 혼자일 때 얘기였다. 그러고 보면 글도 마찬가지다. 혼자 일기를 쓸 때는 세상 편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발행할 때, 책을 만들어 서점에 보내거나 북페어에 나갈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이 펼쳐지는 것이다.
마침내 마주한 강사는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지만, 음악인의 아우라에 그저 기가 죽었다. 마침내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왔다.
“연습한 데까지 한번 쳐보실래요?”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가! 무슨 객기로 학원을 등록했을까! 이 순간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으악 어떡해! 아드레날린이 천장을 뚫고 솟구치는 걸 느끼며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듯 첫 음을 쳤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뒤뚱뒤뚱 나아가다 이내 손가락이 멈춰버렸다. 나에게 피아노 연주란 물 위를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다음 발을 딛는 식으로 정신없이 뛰다가 삐끗해서 꼬로록 가라앉으면 끝이다. 빠진 자리에서 솟아올라 다시 달리는 건 불가능하다. 뭍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연습한 만큼도 못 치고 멈춰버려 속상했지만 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하셨다’며 첫 장의 기본적인 악상을 설명했다. 이 부분은 아주 강하게 쳤다가 점점 약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담담하게 진도를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선생이라도 ‘음, 이렇게 치는 정도니까 이런 걸 가르치면 되겠군’ 하는 생각뿐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같은 부분을 강사가 시범으로 연주하자 입이 딱 벌어졌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음색이라는 거구나! 내가 칠 때는 피아노(p)나 포르티시모(ff)나 똑같은데, 그의 연주는 가뿐히 떠올랐다 쿵 무너지듯 감정이 살아 있었다. 같은 악기로 같은 건반을 두드리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너무 신기했다.
그 후 벼랑에서 떠밀려 수영을 배우듯 많은 고비를 넘기며 레슨을 받았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했던 페달 밟기도 성공했다. 이래서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거였다. 학생이 무섭다고 저항해도 꿋꿋하게 자전거를 밀어주는 사람. 적절한 타이밍에 손을 놓아주고, 넘어지면 일으켜주는 사람. 반 년쯤 지나자 드디어 비창의 마지막 마디까지 어설프게나마 칠 수 있게 되었다. 비창보다 더 때려부수는 곡,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의 종’도 완주해냈다.
그랬던 것이 벌써 몇 년 전이다.
업무에 치이고 야근이 늘면서, 그리고 나 자신도 매너리즘에 빠져 연습 횟수가 줄었다. 학원을 그만뒀고, 겨우 완곡한 어려운 곡들도 실력이 퇴화해 초반부도 제대로 못 치게 되었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큰 산을 넘어본 경험이 생긴 거니까. 나이가 들어 그 산에 다시 못 오르게 됐다고 해도 과거의 등반이 의미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렇게 어둡고 빠르고 격한 음악들이 필요했고,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을 지나온 것이다(자기합리화 하나는 진짜 잘하는 것 같다).
이제 나는 그보다는 조금 덜 복잡한 곡들을 친다. 질리지도 않고 월광을 계속 치는 가운데,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 듣고 반해버린 ‘아스투리아스’를 연습하고 있다. 언젠가는 바흐의 ‘시칠리아노’와 ‘평균율 1권 2번 프렐류드’, 차이콥스키의 ‘사탕요정의 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삽입곡 ‘Secret’을 자유롭게 치고 싶다. 굴다리 밑 길거리 피아노에서, 월광 아닌 다른 곡을 치는 상상을 한다.
선곡 리스트(링크)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Op.3 No.2(모스크바의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