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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게 해주고 싶어서, 콩나물 기르기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7)

by 이제

콩나물을 심었다. 시루에 콩을 부어 콩나물을 기른 게 아니다. 하얀 줄기에 노란 대가리가 달린 콩나물 한 가닥을 페트병 화분에 심었다. 이를 위해 본가에서 화단의 흙을 얻어왔다.


“저 흙 좀 가져가도 돼요?”

“뭐 하게?”

“콩나물 심게요.”

“콩을 심는다고?”

“아뇨, 콩나물이요. 노란 콩나물. 기다란 거요.”

“무슨 콩나물을 심어. 콩을 심어야지.”


아빠는 기어이 흙 한 봉지와 함께 강낭콩 종자를 얹어 줬다. 그러나 내가 심고 싶은 건 콩나물이었다. 마트에서 파는 콩나물도 땅에 심으면 콩으로 자랄지 궁금했다. 시루와 비닐 속에서 짧은 평생을 보내고 이제 곧 끓여질 위기에 처한 콩나물을 구출해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혼자만의 공간은 필요한 법이다. 빽빽함의 상징인 콩나물에게도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나 또한 곧 빽빽한 회사를 탈출해 나만의 방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니.


열다섯 번째 아날로그 휴일, 냉장고 야채칸에 있던 200그램들이 콩나물 봉지를 뜯었다. 그 속에 제일 깊숙이 파묻혀 있던, 꼬리가 살짝 비실비실한 가닥을 골랐다. 1.5리터 페트병을 잘라 흙을 채우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콩나물을 세로로 꽂고, 흙을 다독여 고정했다.


당사자의 의사를 물어본 건 아니다. 어쩌면 그 비실이는 딱히 자기 방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키워보고 싶었다. 반쯤은 자연관찰실험을 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과연 냉장고에 있던 콩나물이 살아날 수 있을까? 혹시 잘 못 자라더라도 사는 동안에는 햇볕 쬐면서 마음껏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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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회사에 다녀오니 노란 대가리가 그새 초록색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싹이 뾰족 나오더니 하루가 다르게 잎이 돋고 줄기가 솟았다. 대가리였던 것은 통통한 녹색 떡잎으로 부풀었다가 떨어지고, 보송보송 털 난 잎사귀들이 기세 좋게 팔을 쳐들었다. 막대기로 버팀목을 세워줘야 할 정도로 쭉쭉 키가 컸다. 잔뿌리가 잔뜩 뻗어 흙덩이를 빈틈없이 움켜쥐었다. 내가 언제 콩나물이었냐는 듯 어엿한 콩 한 포기로 자라났다. 심지어 꽃이 피고 콩이 열렸다. 콩나물 한 가닥이 이렇게 변하다니, 이렇게 변할 수도 있었다니!


너무 신기하고 기특해 수시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다. 팔불출처럼 지인들에게 콩 사진을 자랑했다. 가족들과 직장동료들도 가끔 콩나물 안부를 묻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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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내가 기른 콩이 무슨 종류인지 모른다. 꽃이 폈을 때 꽃 색깔을 알았고, 콩꼬투리를 열어보고서야 콩 모양과 색깔을 알았다. 그게 더 좋았다. 굳이 검색으로 종류를 알아내거나, 꽃 모양 콩 모양을 미리 보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꽃이 피고 콩이 열릴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줘야겠다 싶을 때 물을 줬고, 계속 자라기에 버팀목을 세웠다. 그러다보니 이렇게까지 자란 것이다.


꽃은 나팔 모양으로 흰색과 연보라색이 섞여 있었다. 막 꺼낸 콩알은 노르스름한 강낭콩 모양이었는데, 딱딱하게 마르자 연녹색 구슬이 되었다. 깜빡 놓쳐 책상에 떨어뜨리니 땍때그르 하고 굴러갔다. 아무래도 영양이 부족했는지 꽃과 콩은 아주 매우 몹시 작았다.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올리니 엄마 왈, ‘콩 심은 데 콩 나는 줄 알았는데 녹두장군이 나오심’.


최종 수확량은 스물여섯 알이었다. 콩알 크기는 녹두만 하거나 녹두보다 더 작았다. 미니그릇 충동구매 시기에 산 소스그릇에 소중히 담아두고 몇 달을 궁리했다. 몇 개는 흙에 심고 몇 개는 콩밥을 지어볼까? 몇 개는 내가 키우고 몇 개는 분양할까? 한 숟갈도 안 되는 콩 몇 개로 소꿉장난 같은 고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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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비교를 위한 손가락 출연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다가 『어린왕자』를 다시 만났다. 알고 보니 스님은 어린왕자를 진심으로 사랑한 찐팬이었다. 고개를 돌려 책상 옆 콩나물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이 콩나물이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온 세상 수백억 가닥의 콩나물 중에서 유일한 콩나물이 되어 있었다. 시장이나 식당에서 콩나물을 볼 때마다 내 콩나물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었다. 내가 콩나물을, 콩나물이 나를 길들인 것이다.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 있게 해주고 싶어서 시작한 콩나물 기르기였다. 그런데 결국 나와 콩나물의 관계가 생겨났다. 늘 옆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 잘 살아가는 관계였다. 혼자들의 느슨한 공존.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콩나물을 심은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콩 줄기는 살아 있다. 반쯤은 낙엽이 되었는데도 아직 물을 준다. 우연히 읽은 성경구절처럼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니’ 곧 마른 콩 줄기를 뽑아낼 때도 올 것이다. 그때는 어떤 기분이 들까? 농사짓고 거두는 농부 같은 기분이겠지? 설마 장미를 떠나보내는 어린왕자 같은 기분이 들진 않겠지? 설마, 아니겠지……? 조금 두려워진다.




p.s.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야말로 한시바삐 ‘심은 것을 뽑을’ 때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뽑히는지 모르겠다. 설마 이번 주에도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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