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19)
집에 돌아오자 공무원도 여행객도 아닌 민간인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매일 00시부터 18시까지 스마트폰이 잠기도록 설정한 다음(뒤에서 더 설명할 예정) 자유를 즐겼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며칠 동안 뒹굴대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다섯 권을 독파했다. 저녁 산책을 나가 강 건너편 도로에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을 목격하기도 했다. 심심할 때는 그냥 심심해 했다. 시간이 넘쳐나니 이제야 직접 밥을 차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간단하고 맛있는 간장계란밥에 꽂혀 매일 만들어 먹었다. 배달음식 중독이 저절로 고쳐졌다. 폰 잠금이 해제되면 명작드라마 <스토브리그>를 한두 편씩 시청했다.
달력을 보며 하루하루 감동했다. 아아, 3일이 이렇게 마음 편할 수 있다니! 10일이 이렇게 한가할 수 있다니! 16일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니! 18일이, 19일이, 20일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 매달 정신없이 돌아가던 쳇바퀴를 벗어나자 매일이 고요해졌다. 직장에서라면 폭풍이 몰아쳤을 마감 시즌에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5년간 고생한 과거의 내가 적금과 구직급여와 퇴직 일시금*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었으므로, 아껴 쓰면 2년 정도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동안 진짜 제대로 내 진로를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퇴직 일시금: 그동안 적립한 기여금을 퇴직 시 돌려받는 것. 10년 이상 기여금을 납부하면 공무원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나는 5년 만에 퇴직했으므로 일시금으로 받았다.)
그저 적당히 살고 싶었다. 적당한 속도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며 적당히 건강하게 살고 싶었다. 그동안은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듯이 산 것 같았다. 너무 빠르게 너무 완벽하게 너무 많이 일해서 너무 많이 가지려고 안달복달하는 삶은 이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서 적당함이란 ‘평균’이나 ‘중간’처럼 남과 견주는 기준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억압받거나 억압하지 않는 자유로움에 가깝다. 이제는 내 적당을 내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남들이 뭐라든 내가 적당하다고 느끼면 적당한 거다.
이런 식으로는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어려울까? 내가 너무 인생을 만만하게 보는 걸까? 하지만 망해봤자 죽기밖에 더 할까. 만만찮은 사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서 적당히 대처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다. 살다보면 해결되지 않는 일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해결’이나 ‘성공’은 정거장일 뿐이고, 어차피 인생의 대부분은 길에서 보내게 된다. 그 길을 꼭 뛰어서만 가야 할까? 살다보면 뛰어야 할 때도 있고 나무를 타야 할 때도 있겠지만 항상 숨차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나답게 살면서도 먹고살 길이 있을까? 책을 쓰고 만드는 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로 자립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짐작도 못 하는 제3의 길이 나타날까? 알 수 없다. 결말을 모르는 소설을 읽듯 직접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엔딩이야 어떻든 내용은 재밌길 바라면서.
혼자 일하려면 생활 체계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직장에서 업무 시간·장소·과업·분량·일정·보상 등등을 정해줬지만 이제는 다 내 책임이니까. 최소한의 시스템이 없다면 날마다 그날 할 일을 새롭게 결정해야 하고, 시동을 걸기도 더 힘들어진다.
빡빡한 계획을 착착 실천해 성과를 내는 ‘갓생’을 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에게 적당히 맞는 형식과 리듬이 필요했다. 여유롭게 지내더라도 정신줄은 붙잡은 채로 여유롭고 싶었다. 며칠 내내 누워서 놀다가 마감 직전에 카페인 음료를 들이부어가며 산처럼 쌓인 자료와 컵라면 용기에 파묻혀 밤을 새우는 식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 괴로울 것 같았다.
일단 금쪽같은 생계비를 어영부영 낭비하지 않도록 지출 체계부터 정비했다. 이 돈을 아낄수록 더 오래 자유로워지니까. 영화 <마션>에서 화성에 혼자 남겨진 마크 와트니가 식량 재고와 자신의 기초대사량을 계산해 생존 계획을 세웠던 것처럼, 현재 예산과 꼭 필요한 생활비를 파악해 매달 용돈을 받아 쓰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월 소비를 규칙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용도별로 계좌를 나눴다. 1년간 쓸 돈은 ‘예산’ 계좌에 두고 나머지는 예금으로 묶었다. 예산 계좌에서 매달 일정 금액을 ‘고정비’, ‘생활비’ 계좌에 각각 자동이체시켰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월세·공과금 등은 고정비 계좌에서 나가게 하고, 이용이 뜸해진 구독 서비스는 취소했다. 식비 등 일상적인 소비는 생활비 체크카드만 사용하기로 했다. 가끔 목돈이 나가는 가족 행사·선물은 ‘가족’ 계좌로, 수강료·여행 비용 등은 ‘자기계발’ 계좌로 분리했다. 생활비가 떨어졌다고 가족 생일을 못 챙기거나 듣고 싶은 교육을 못 듣는 사태는 예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용돈을 제한하니 지출의 우선순위를 따지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적은 돈으로 더 나은 효과를 얻을지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주일 식비가 6만 원인데 3만 원짜리 배달음식을 턱턱 사 먹을 수는 없다. 그 돈이면 돼지고기 두 근에 15구 계란, 잘하면 채소까지 약간 추가해서 일주일치 반찬을 해결할 텐데 말이다. 절약에도 창의력이 필요했다. ‘한정된 돈을 알뜰하게 쓰는 법’을 구상하는 게 은근히 재미있기까지 했다.
물론 계획이란 게 늘 그렇듯 이 계획도 완벽하게 지켜진 건 아니었다. 용돈이 모자라 예산 계좌에서 야금야금 돈을 빼먹은 적도 많았다. 예산을 아무리 잘 짜도 추경은 필요한 게 국룰이니까. 그래도 아예 계획 없이 쓰는 것보단 한 달 용돈을 의식하면서 소비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었다.
아날로그 시간도 내 재산이었다. 스마트폰 없이도 좋은 하루를 보낸 경험들이, 백수가 되어도 폰만 보며 지내지는 않겠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화면이 있는 전자기기들을 부엌 구석 책상에 몰아넣고 커튼으로 덮은 ‘디지털 존’(링크)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실시간으로 메신저를 확인하며 멀티태스킹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컴퓨터 앞을 떠나도 좋았다. 손글씨·손그림 등 아날로그 작업을 주력으로 하고, 꼭 필요한 디지털 작업은 요일을 정해 몰아서 하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스마트폰에는 ‘앱블록’ 앱을 설치해, 매일 00시부터 18시까지는 전화·카톡·카메라·교통·은행 등 일부 앱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잠갔다. 인터넷·유튜브·OTT·SNS 등 특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앱들은 저녁에만 총 3시간 이내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런 설정을 바꾸지 못하도록 유료 기능인 엄격모드를 적용했다.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아예 디지털 존 커튼을 닫아두고 폰을 보지 않았다. 사람들과 너무 자주 연락을 끊기는 뭐해서 전화·카톡 정도만 확인했다.
어쩌면 고지식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글쓰기에 AI를 적극 활용 중이고, AI까지는 아니라도 다양한 문서작성 프로그램과 인터넷 검색을 잘 활용하면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작업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굳이 폰을 잠그고 종이에 글을 쓴다는 건 일종의 회피가 아닐까? 기술의 발전 속도에 적응하지 못해 뒤처져놓고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거’라며 여우의 신포도 식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깟 포도 좀 안 먹으면 어떤가? 안 먹었으면 어떻고 못 먹었으면 어떤가? 그 포도송이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지 낚싯줄에 매달려 있는지는 한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인터넷·전자기기와 격리된 시간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그것들과 싸우기가 피곤해서였다. 녀석들은 애초부터 적당히 하기가 어렵도록 설계되었다. ‘내 목표는 너의 접속 시간을 최대한 늘리는 거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볼까?’라며 덤비는 상대와 매순간 싸워 이길 기력이 없었다.
글쓰기에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다보면 십중팔구는 딴길로 새서 인터넷 서핑에 두 시간을 훌쩍 보내기 마련이고, 그림을 그린다고 태블릿을 펼쳐도 어느새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게 마련이었다.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딱 한 입만 먹고 냉동실에 넣기 어렵듯, 스마트폰으로 단어 하나만 딱 검색하고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예 안 쓰는 게 더 쉬웠다.
또 한 가지, ‘궁금증을 즉시 해소하는 감각’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검색해서 해답을 찾는 습관이 드니 내 머리로 생각해서 답을 찾거나, 인터넷 이외의 다른 자료를 참조하는 능력이 퇴화되는 것 같았다. 호기심의 질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답을 얻기가 너무 쉬우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도 별생각 없이 검색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정보의 중요도를 판단하지 않고 너무 많은 정보를 습득하게 되어 결국은 대부분 잊어버리고 만다.
다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아예 멀리할 생각은 없었다. 편리한 컴퓨터 프로그램, 내가 좋아하는 영상 콘텐츠, 네티즌들이 전해주는 유용한 정보와 기발한 농담을 포기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의 역할을 나누고 싶었다. 전자기기를 이용하되, 그것들이 내 삶을 전반적으로 장악하지는 않도록 적당히 선을 긋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