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최종회
처음에는 그냥 취재 여행을 떠난다고 했어요. 봄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를 수집하겠다나요? 봄 구석구석에 흩어져 뭔가 끄적이는 사람들, 그들이 써낸 벚꽃엔딩스럽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어보고 싶다고요. 환하고 아름다운 봄뿐만 아니라, 음침한 봄, 열받는 봄, 무서운 봄, 따분한 봄…… 따위도 있지 않겠냐고요.
어처구니가 없었죠. 안 그래도 짧은 봄인데 왜 굳이 음침하고 열받고 무섭고 따분한 이야기들을 찾아다니는 건데요. 실컷 즐기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안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칩시다. 세상에 하도 달달한 봄 얘기가 넘쳐나니까 달달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궁금해졌겠죠. 단짠법칙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아이스크림 먹다 보면 떡볶이 땡기고, 떡볶이 먹다 보면 프라푸치노 땡기고, 그렇게 점점 살쪄 가는 게 인생사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런 문제라면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잖아요. 인터넷 검색창에 ‘봄’이라고 쳐보기만 하면 엄청나게 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올 텐데, 그중에는 분명 이모가 찾는 이상한 이야기들도 많을 텐데 말예요.
처음에는 이모도 내 충고를 듣는 것 같았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곤 했죠. 그런데 가까이 가 보면 순 엉뚱한 글만 읽고 있는 거예요. 초간단 다이어트 레시피, 거북목 예방 스트레칭, 시그널 결말 예측 등등. 하긴 웹서핑이란 게 원래 그렇죠. 클릭, 클릭, 하다보면 원래 찾던 키워드 따윈 까맣게 잊혀지는 법이잖아요. 하여간 집 나가기 전까진 계속 방에만 처박혀 있었던 것 같아요. 외할머니가 방문 밖에서 어찌나 한숨을 푹푹 쉬시던지.
사실 외할머닌 이모한테 기대가 컸거든요. 이모가 저래봬도 영문학 박사예요. 이십대 후반까지 쌩얼에 책가방 메고 다니며 공부하는 동안, 외할머니 외할아버진 이모가 꼭 교수가 되리라고 철석같이 믿으셨죠. 그런데 웬걸요. 해외 명문대 나온 박사들이 수두룩빽빽한데 국내파 영문학 박사가 어디서 교수 자릴 얻겠어요. 언젠가 딱 한 번, 왕복 여섯 시간 걸리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학기 끝나고는 도저히 못 해먹겠다고 하더라고요. 잘은 모르지만 차비도 안 나왔을 거예요, 아마.
그래서 그때부터는 어떻게든 번역으로 먹고살겠다며 서울 자취방 빼서 외가에 들어앉더군요. 그게 한 10년 전쯤, 내가 초딩 꼬꼬마였을 때예요. 말이 좋아 프리랜서 번역가지, 일 없으면 백수나 마찬가지잖아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속이 타셨겠어요.
그게 다가 아니었죠. 그 무렵 아빠가 하던 보드게임 카페가 홀랑 망해버렸거든요. 외가에서 창고로 쓰던 방을 치워서 우리 가족이 들어갔죠. 그때부터 엄마 아빤 돈 벌어 빚 갚느라 집에 붙어 있지를 못했어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외가 식구들, 나머지 이할은 보드게임이었죠. 넓지도 않은 방에 낡은 보드게임이 어찌나 많이 쌓여 있었는지, 할리갈리, 쿼리도, 루미큐브, 맨하탄…… 안 해본 게임이 없다니까요. N세트 젠가 해보셨어요? 젠가 몇 세트를 높이 쌓아서 하는 건데, 그 아슬아슬한 맛을 알면 한 세트짜리는 시시해서 못 하죠.
보드게임의 상대는 대부분 이모였어요. 어렸을 땐 이모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니까요. 맨날 놀기만 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내가 허겁지겁 아침 먹고 학교 갈 때, 이모는 항상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죠. 늦게 일어나는 만큼 늦게 잤겠지만 그런 거야 내 눈에 안 보이니까요. 아주 가끔 용돈도 주고 하는 걸 보면 그래도 계속 일은 한 모양이지만, 수입은 얼마 안 됐을 거예요. 부모 집에 빌붙어 있으니까 그나마 먹고산 거지.
그렇게 십 년쯤 남의 글 번역하면서 살다 보니 이모도 싫증이 났나봐요. 아니면 일감이 끊겨서 멘붕에 빠졌는지도 모르죠. 지난겨울부터는 번역 일도 잘 안 하고, 아무래도 좀 이상하더라고요. 자꾸 안 하던 소리를 하는 거예요. 소설을 쓰겠다느니, 취재 여행을 가겠다느니, 봄스럽지 않은 봄 얘기를 수집하겠다느니. 그러다가 결국 쪽지 하나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죠.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 brunch.co.kr/@seasonalwriter
이모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몰라요. 일주일에 한 번씩 이상한 글이 올라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모의 정신건강이 걱정될 뿐이죠. 로또 당첨된 작가지망생이나 등산 좋아하는 부장님 얘기는 그렇다 쳐요. 하지만 말하는 개구리는 너무하잖아요. 오대박 작가 얘기만 해도 그래요. 오대박은 작년에 데뷔한 신인작가라고요. 이런 사람이 20년 동안 작품활동을 하고 인공지능 소설기계의 실험대상이 됐다고요? 아니 무슨 타임머신이라도 탔나? 지난주는 또 어땠다고요. 연휴 마지막 날 피곤한 사람들은 왜 데려다가 말을 시키냐고.
바깥은 완연한 초여름 날씨네요. 봄도 다 갔으니 봄 얘기 찾으러 간 이모도 집에 돌아올까요? 난 글 같은 거 안 쓰는 사람인데, 나중에 취업 자소서 쓸 생각하면 앞이 깜깜한 사람인데, 어렸을 적 내 키만큼 젠가를 쌓아놓고 같이 놀던 생각이 자꾸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긴 글을 써봅니다. 저희 이모를 보신 분은 꼭 좀 연락 주세요. 나이는 서른여덟, 키는 160, 오른쪽 눈꺼풀에 점이 있습니다.
이모, 이제는 철들 때도 됐잖아.
그만 좀 싸돌아다니고 제발 돌아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