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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간의 정리, 내 방의 지리를 다 파악했다는 것

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22)

by 이제

총면적 6평 남짓, 방과 부엌과 화장실로 이루어진 공간을 정리하는 데 장장 열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작업 과정을 크게 ‘비우기, 정돈하기’로 나누어, 각 단계의 원칙과 구체적인 과정을 적어본다.


[비우기]

1. 종류별로 모든 물건을 꺼내 한데 모은다.

먼저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몽땅 바닥에 내려놔 책상을 비웠다. 빈 책상을 작업대 삼아 특정 종류의 물건을 다 모았다. 집안 곳곳에 널린 필기구를 쓸어모아 필기구 정리부터 시작하는 식이었다. ‘종류별로 다 모으기’는 여러 정리 책에서 강조한 방법이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왜 중요한지 납득이 갔다.


이 단계에서 내 소비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책 욕심은 그렇다 쳐도 종이 욕심이 엄청났다. A4용지, B5용지, A5용지, A6용지, 각종 색지와 특수지, 도화지, 원고지, 악보용지, 드로잉북, 무선노트, 유선노트, 스프링노트, 실제본노트, 큰 수첩, 작은 수첩, 상철수첩, 좌철수첩, 코끼리똥으로 만든 수첩, 물에 젖지 않는 수첩까지 벼라별 지류가 넘쳐났다. 필기구도 수백 자루가 나왔다. 이 많은 물건 중에 얼만큼을 남기면 부담 없고 적당할지 어림잡아봤다.


2. 모든 물건을 낱낱이 확인해 일정량만 남긴다.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불량품을 골라내듯 책상 앞에 죽치고 앉아 일일이 선별했다. 필기구도 하나하나 선을 그어보고, 사진이나 스티커처럼 자잘한 것도 샅샅이 넘겨보며 정말 필요하거나 마음에 드는 것만 남겼다.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지만 한 종류씩 해치우는 성취감도 있었다. 책이라는 산맥을 넘고 문구류의 정글을 뚫고 기념품의 늪지대를 건너 정체 모를 전선들의 덤불을 헤치며 험난한 길을 꾹 참고 나아갔다. 그러다 가끔은 잊고 있었던 추억이나 마음에 드는 습작, 유용한 물건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3. 찜찜하면 비우고, 다시 살 것 같으면 남긴다.

입을 때 기분이 별로인 옷, 너무 오래된 냉동실 식재료, 낡은 멀티탭처럼 위험한 물건, 너무 크고 무거워 부담스러운 물건, 세척·관리가 번거로워 잘 안 쓰는 물건, 내구성이 약해 불안한 물건 등등 뭔가 마음에 걸리는 물건은 비웠다. 당장은 안 쓰지만 막상 버리면 언젠가 비슷한 걸로 다시 살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물건은 일정 분량만 남겼다.


4. 아날로그 물건을 디지털 파일로 대체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물건을 적당히 줄이기는 하되 종이책을 버리고 전자책으로 전향하거나 종이사진을 카메라로 찍어두고 버릴 생각은 없었다. 종이만이 가진 매력도 있고, 디지털화된 소유물이 많을수록 전자기기에 더 얽매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옛 사진을 보고 싶을 때마다 스마트폰을 켜야 한다면 과연 사진만 딱 보고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 연약한 자제력을 너무 잦은 유혹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5. 중고로 팔지 않는다.

상태가 좋은 물건을 비울 땐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하거나,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밖에 내놨다. 경제적으로는 손해일 수 있지만 당근에 게시물 올리고 알람 확인하고 약속 잡고 만나고 어쩌고 하려면 돈보다 더 큰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갈 것 같았다. 어차피 딱히 비싼 물건도 없어서 쉽게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6. 안 쓰고 버릴 물건은 사지 않는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돈 주고 샀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내가 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물건을 충동구매했는지, 그 물건을 왜 안 썼는지 돌아봤다. 내 취향과 소비패턴을 참고해서 앞으로는 쓸 만한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물건들이 지정된 분량에서 넘치지 않도록 꼭 필요한 물건만 사기로 다짐했다.



[정돈하기]

1. 종류별로 모든 물건의 제자리를 정한다.

용도에 따라 쓰기 편한 자리에 물건들을 배치한 뒤, 그 물건은 그 자리에만 놓기로 했다. 자기 전에 읽는 책 자리, 상온보관 음료수 자리, 택배송장·영수증 자리 등 사소한 것까지 제자리를 정했다. 그래야 물건이 아무데나 굴러다니지 않고, 새로 산 물건도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바로 정리할 수 있다. 정 분류하기 애매하면 ‘잡동사니 상자’에 넣기로 했다.


2. 잘 보이도록 꺼내 놓는다.

책들은 모두 제목이 보이게 꽂고, 자주 사용하는 문구류는 책상 주변 손이 잘 닿는 위치에 배치했다. 낡은 지갑 속에서 발견한 가족사진을 벽에 붙이고, 상자에 고이 모셔뒀던 굿즈 세트도 정말 예쁜 것만 남겨 진열했다. 기념품으로 모아두기만 했던 엽서·스티커도 미술재료나 접착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책상 가까이 수납했다.


3. 수납용품부터 사지 말고 집에 있는 것을 활용한다.

우유팩, 반찬통, 선물상자 등을 최대한 활용해 수납했다. 집에 있던 물건을 절묘하게 응용하면 재미있고 뿌듯하며 자원도 절약된다. 섣불리 산 수납용품은 그 자체로 짐이 될 수도 있다. 웬만큼 정리를 끝낸 다음에야 어떤 수납용품이 정말로 필요한지 알게 된다.


4. 세워서 수납한다.

눕혀서 쌓으면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밑에 깔린 물건은 안 쓰게 된다. 케이스에 들어 있던 사인펜이나 색연필은 다 꺼내서 필기구 통에 꽂고, 아크릴 물감도 뚜껑에 물감을 찍어 색을 표시한 뒤 세워서 꽂았다.


5. 방바닥에 물건을 놓지 않는다.

바닥에 덜렁 놓여 있던 물건들을 모두 가구에 올려 수납했다. 바닥에 잡동사니가 많으면 돌아다니다 발에 채이기 쉽고 청소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멀티탭이나 전선도 최대한 바닥에 끌리지 않게 정리하고, 플러그마다 테이프를 붙여 무슨 기기의 플러그인지 적어놨다.


6. 무엇은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다.

물건·가구가 원래 있던 자리보다 더 나은 위치가 없는지 고민하고 바꿔봤다. 40평생 동안 책상은 으레 벽에 붙여야 되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벽을 등지고 앉도록 위치를 옮기니 시야가 트여서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카페에서도 항상 벽을 등진 구석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부엌 상부장 일부는 문짝을 떼서 오픈형 선반처럼 만들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작업에 손가락이 아작날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목장갑이 지켜줬다. 그 목장갑도 정리하다 발굴해낸 물건이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정리를 마쳤다. 종량제봉투 260리터 분량, 특수규격마대 40리터 분량, 음식물쓰레기 10리터, 폐지 2박스, 새 노트와 드로잉북 상당량, 작은 가구 서너 개, 대형 화이트보드 두 개 등등을 버리거나(반성한다) 기부했다.


‘오늘의 집’ 스타일의 예쁜 집은 아니지만 적어도 모든 물건에 주소가 생겼다. 눈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읊을 수 있었다. 책상은 널찍하게 탁 트였다. 책상 좌우의 낮은 책장들에는 일기, 서류, 노트북, 문구, 화구, 지류, 약 등이 종류별로 꽂혔다. 각종 주방용품과 냉온·상온 식재료, 각종 잡화들도 각자의 제자리에 착착 들어갔다. 몹시 뿌듯했다.


정리하기 전에 내 방은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이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내가 어떤 도구와 재료를 갖추고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 약국이나 서점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과 비슷했다. 주변 가게들도 아무 물건이나 마구잡이로 파는 잡화점이어서, 무슨 물건을 어디에서 파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 물건을 하나하나 확인해 자리를 잡아주니 그제야 ‘내 방’이라는 작은 마을의 지리를 다 파악한 듯했다. 가게들도 ‘서점, 화방, 약국’ 등으로 취급 품목이 구분돼,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 어디로 가면 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저 약국을 찾아가는 시간을 아낀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 마을에서 더 편하고 자신 있게 생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때로부터 8개월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는 물건이 조금 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각자의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솔직히 ‘조금만 더 넓은 집, 조금만 더 깔끔한 집, 조금만 더 전망이 좋은 집’ 등등에 살고 싶은 마음에서 아예 해방된 건 아니다. 그래도 이 집에 적당히 만족하면서 산다. 가끔은 살림살이란 게 전혀 없는 카페나 호텔, 텅 빈 방 따위를 꿈꾸기도 하지만 사실 제일 편한 공간은 필요한 도구들이 손 닿는 위치에 전부 갖춰져 있는 내 방인 게 사실이니까.


요즘 『최적화라는 환상』(코코 크럼, 위즈덤하우스)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최고의 효율과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최적화 정신의 연장선으로 미니멀리즘이 유행했다는 주장이 흥미로웠다. 내가 방 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돈 관리를 위해 계좌를 분리하고,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것도 최적화의 일환일까? 어쩌면 나도 최적화에 집착하는, 그러면서도 또 최적화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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