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 (21)
직장에서 내 자리는 우리부서 최고의 쓰레기 책상이었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자료와 수정 시안을 컴퓨터 주변에 산처럼 쌓아두고 내가 이렇게 바쁘며 내 정신상태가 이 지경이라는 걸 만천하에 보여줬다. 잠 깨는 껌, 과자봉지, 음료수병, 포스트잇 따위도 여기저기 쑤셔박혀 쓰레기장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두 달에 한 번쯤, 서류더미가 무너지기 직전에 이르면 큰맘 먹고 모든 서류를 널찍한 회의용 테이블에 날랐다. 그러고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죽치고 앉아 그 많은 서류를 보관/파쇄/분리배출로 나눠 정리했다. 몇 시간이나 걸리는 대공사였다. 퇴사할 때는 5년간 쌓인 개인짐을 정리하느라 개고생을 했다. 드라마에서는 다들 상자 하나 달랑 들고 퇴사하던데, 나는 한동안 퇴근할 때마다 조금씩 짐을 나른 걸로도 모자라 막판에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와 배낭을 가득 채워 초여름 땡볕 아래 걸어가야 했다.
그나마 집에서는 상황이 좀 나았다. 방바닥에 옷을 던져두거나 컵라면 용기로 탑을 쌓지도 않았고, 책상 위도 제법 널널한 편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물건이 많고 어수선한 건 맞았다. 마음 같아서는 퇴사와 함께 이사도 하고 싶었다. 낡고 좁은 집을 떠나 넓고 쾌적한 집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거다. 이사하는 김에 필요 없는 물건과 2~30년 묵은 가구들도 싹 다 버리고, 새 가구를 최소한만 사서 정갈하게 살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제 막 백수가 된 마당에 현실적으로 이사는 무리였다. 대신 정리정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예능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를 보고, 정리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었다. 물건을 확 줄이고 가구를 적재적소에 옮기니, 짜잔! 하고 새 집처럼 변신하는 게 아닌가? 집이 넓어지고, 새 방이 생겨나고, 햇빛이 들어오고, 동선이 짧아졌다. 너무 신기했다.
그렇게 지금 내 방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물건이 적을수록 작은 집에서도 쾌적하게 살 수 있다. 더 큰 집에 살기 위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큰 빚을 질 필요가 없어진다. 한마디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무리 가져도 더 가지고 싶은 욕심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에서 정리·인테리어 관련 책이 모여 있는 590번대 생활과학 서가(한국십진분류법 참조)에 달라붙어『당신의 인생을 정리해 드립니다』(이지영, 쌤앤파커스),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에린남, 상상출판), 『정리의 힘』(곤도 마리에, 웅진지식하우스), 『곤마리 씨, 우리 집 좀 정리해주세요』(곤도 마리에, 더난출판사),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유루리 마이, 북앳북스), 『정리의 여왕』(이케다 교코, 넥서스BOOKS),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미즈타니 타에코, 윌스타일) 등을 실컷 골라 야금야금 읽어 나갔다. 정리도 안 하면서 정리 책들은 왜 그렇게 재미있던지!
그런 책을 잔뜩 읽다보니 슬슬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몸은 아직 꿈쩍도 않는 채로 종이에 끄적거리며 구상을 해봤다. 먼저 내 하루를 돌아보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사용하는 물건들의 종류를 쭉 적었다. 여행가방을 꾸릴 때 ‘여권, 상비약, 웃옷, 바지, 속옷……’ 식으로 카테고리를 잡아 채워나가듯이, 내가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용도별로 나눠본 것이다.
내게 필요한 물건: 책, 창작, 서류, 문구, 기념품, 수면, 의류, 냉·난방, 주방용품, 식품, 건강, 위생, 청소, 공구, 수납, 전자기기, 외출
인류에게 재앙이 닥쳐 배낭 하나에 캐리어 하나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한대도 최소한 이 정도 구색은 갖추고 싶을 듯했다. (책)내 인생책 몇 권, (창작)내가 쓴 글들, (서류)신분증·여권, (문구)노트·펜, (기념품)사진 몇 장에 인형 하나, (수면)침낭·방수돗자리, (의류)옷·양말·신발·장갑, (냉·난방)부채·성냥·기름, (주방)냄비·수저·컵, (식품)저장식품으로 최대한 많이, (건강)비상약·붕대, (위생)비누·에탄올·손톱깎이·수건, (연장)장도리·칼·톱·못·실·바늘·끈·테이프, (수납)보자기·밀폐용기·물통, (전자기기)라디오·손전등·건전지, (외출)우비·마스크
가만, 인생책은 뭘 챙겨야 되지? 이거 하루이틀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닌데? 집이 없으니 청소도구만은 없어도 될까? 아니지, 덜 무너진 폐가나 동굴을 운 좋게 발견할 수도 있으니 빗자루 하나쯤은 챙기는 게 좋을지도? 근데 그런 데를 나만 발견했겠어? 실컷 청소해놓고 악당이나 만나겠지. 그러고 보니 열심히 짐 싸서 떠나봤자 어차피 일주일도 못 살 것 같은데? 애초에 저렇게 꼼꼼히 짐 챙길 시간이 있을 리가. 이런 고민 하다 벌써 죽었겠네……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는 인간, 그게 바로 나다.
다행히도 아직은 그런 재앙이 닥치지 않았고, 내게는 방과 부엌과 화장실을 갖춘 1.5룸 자취방이 있었다. 책상과 피아노를 가질 수 있고, 책장에 책을 꽂을 수 있고, 냉장고에 식재료를 보관할 수 있다는 행운에 감사하며 보다 현실적인 주제로 넘어갔다.
1. 나는 각 분야의 물건들을 얼만큼 가지고 있나?
2. 나에게 적당한 분량은 어느 정도일까?
3. 그 물건들을 어디에 두면 좋을까?
이 단계에서도 아직 내 계획은 인류 멸망 대비와 별다를 바 없는 머릿속 공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공상은 차츰 구체화되어갔다. ‘책: 에세이/국내소설/국외소설/시/작법/……’ 식으로 각각의 카테고리를 세분화하고, 에세이는 책장 3칸, 식기류는 싱크대 상부장 한 개, 재봉용품은 수납상자 하나 분량만 남기면 되겠다는 식으로 물건들의 분량과 위치를 어림잡았다. 책에서 읽은 내용과 내 성향을 버무려 나만의 정리 방향도 정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마침내 ‘그래, 한번 해보자!’ 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번 정리의 목표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거나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 물건을 내게 필요한 만큼만 남겨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여유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했다. 정체 모를 짐들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가벼워지고 싶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