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26)
“아휴, 이제야 통화가 됐네.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항상 진동이어서…… 그나저나 어디시죠?”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네? 뭐요?”
“노, 벨, 문, 학, 상이요. 놀라셨구나. 하하하.”
“제가요? 정말요? 등단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노벨상을?”
“등단은 무슨, 노벨상 수상자 중에 신춘문예 당선된 사람 봤어요?”
전화기 너머의 소리가 아득히 멀어지고, 김단의 뇌리에 지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던 한심한 심사위원들, 그동안 온갖 알바와 계약직을 전전하며 겪었던 그 숱한 수모들.
“그래서 말인데, 서류를 좀 보내주셔야 돼요. 스웨덴으로 수상하러 오셔야 되잖아요? 저희가 필요한 게…… 봅시다…… 그래 여권, 여권 있으시죠?”
“없어요,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아이고, 빨리 만드셔야겠네. 오늘 바로 가서 만드시는 걸로 하고, 그 다음은…… 본인확인 후에 상금 수령하셔야 되니까 신분증 사본하고 계좌번호……”
“계좌번호요? 상금이 얼만데요?”
“김 대리, 끊어! 보이스피싱이잖아!”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박 실장이었다. 김단은 당당하게 박 실장을 째려봤다. ‘어디서 또 잔소리야. 내가 누군지 알아!’
“김 대리, 김 대리!”
누군가 어깨를 뒤흔들어, 김단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박 실장이 말했다.
“잘 잤어? 회사에서 잠꼬대를 다 하네? 일이 없나봐?”
아날로그 휴일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속보를 바로 듣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어느 날 하루 만에 핸드폰을 열었더니 교보문고에서 광고문자가 와 있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국 작가 최초,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거대한 충격이 머리를 뽝!!!!! 후려쳤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실화야?!
당장 컴퓨터를 켜서 뉴스를 확인했다. 그새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한강 작가의 책은 이미 전부 품절이었다. 도서관에서도 모든 책이 대출중이었다. 모든 신문의 1면 기사가 한강 작가 소식이었다. 아아, 그것도 모르고 태평한 하루를 보냈다니! 이 역사적인 순간을 실시간으로 즐기지 못했다니! 각종 기사와 댓글을 읽으며, 수상자 발표 당시의 민음사 유튜브 생방을 보면서 내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충격과 기쁨에 이어 떠오른 생각은 ‘이제 노벨상 보이스피싱 농담은 못 써먹겠구나’였다(그래놓고 방금 기어이 써먹었다). 내 수많은 미완성 습작 중 한 장면인데, 나름대로는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처진 에피소드가 되어버렸다. ‘노벨문학상’이라는 말만 꺼내도 누구나 한강 작가부터 떠올릴 것이었다.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 중에도 신춘문예 출신이 생기다니…….
기사로 전해지는 한강 작가의 모습은 의연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아 많이 놀랐고, 이제 수상자 연설문을 쓸 예정이라고 했다. 역시 노벨상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나 같으면 준다고 해도 못 받을 것 같았다(물론 안 주겠지만). 이렇게 전 국민의 관심과 축하를 한 몸에 받고, 언론에 소감을 밝히고, 수상자 연설 같은 걸 해야 된다니! 으악, 난 못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몇 번인가 노벨상 농담을 듣게 되었다. 얼마 뒤 친척 결혼식에 갔더니 이모가 나를 가리키며 “나는 한강 노벨상 보자마자 얘가 생각났다니까. 얘가 얼마나 글을 잘 쓴다고” 하기에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고등학교 친구 모임에서는 “넌 한강 말고 금강 해” 하는 말에 빵 터졌다. 통유리 밖으로 금강이 내다보이는 고깃집에서였다.
‘수상을 예견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문학 팬들과는 달리, 애석하게도 나는 한강 작가의 애독자까지는 아니었다. 읽은 책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뿐으로 솔직히 너무 오래전에 읽어 내용도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팬들이 부러워하는 ‘안 본 눈’의 소유자인 것이다. 작가는 최근작 먼저 읽기를 추천했지만, 나는 출간 순서대로 모든 책을 정주행하기로 했다. 지난 30년 동안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따라가보고 싶었다. 마침 백수가 되어 시간도 많은 이때가 아니던가?
이십대에 펴낸 『여수의 사랑』부터 최근작인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모조리 주문했다. 책이 다 도착하기까지 2주가 넘게 걸렸다. 한 권씩 야금야금 읽어나가며, ‘노벨상 작가의 작품을 모국어로 읽는’ 행운을 마음껏 누렸다. 조용한 방에서, 단골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 지하철에서, 도서관에서, 공원에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천천히 읽었다.
문학작품의 가치를 수상 여부로 평가하거나, 노벨문학상을 올림픽 금메달처럼 ‘작가들 중에서 최정상에 올랐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입장이다. 나에게는 내 가족이나 내가 좋아하는 무명작가의 글이 그 어떤 걸작보다 값질 수 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평생을 문학에 매진하며 심오한 질문에 천착하고, 국어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갈고닦고,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작품을 읽는 것 또한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소식이 올해의 가장 큰 뉴스일 줄 알았다.
두 달쯤 흘렀을까. 그날도 나는 핸드폰 없이 자고 일어났다. 핸드폰 없이 운동을 다녀와 점심 무렵에야 잠깐 열어봤더니, 이럴 수가! 이번에는 아주 나쁜 방향으로, 하룻밤 사이에 온 나라가 뒤집어진 게 아닌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비상계엄이라니, 이게 실화라고? 2024년에? 바로 어젯밤에? 미쳐도 미쳐도 이 정도로 미쳤다고? 내 평온은 한순간에 박살났다. 컴퓨터 앞에 달라붙어 종일 뉴스를 보고, 광화문으로 여의도로 쫓아다니는 나날이 펼쳐졌다. 8년 만에 탄핵집회를 나가보니 체력이 떨어진 게 실감이 났다. 달라진 집회 문화와 그 이후의 경과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라 굳이 더 쓰진 않으련다.
너무 많은 뉴스와 인파와 갈등에 정신이 없던 어느 날, 다시 아날로그 휴일을 가져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제는 실시간 뉴스와 댓글을 멀리하고 신문과 잡지를 읽어야겠다고. 댓글 100개를 읽는 것보다 논리정연한 글 1편을 읽는 게 낫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속보들을 실시간으로 따라잡기 위해 내 일상을 전부 바쳐야만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저 내 할 일만 하기로 했다. 어느 날은 종이책과 종이잡지를 읽고, 손글씨로 일기를 쓰고, 핸드폰 없이 소풍을 갔다. 어느 날은 집회에 나가 한 사람분의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노벨상은 참 받기 힘든 상이었다. 선정되기가 어려운 건 물론이지만 수상하는 절차 자체도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으리으리한 한림원 그랜드홀 맨 앞자리에 앉아 코앞에서 연주되는 첼로 음악을 10여 분 동안 감상한 뒤 수상자 연설을 해야 했으며, 시상식에서는 발목이 덮이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어야 했고(언론은 한강 작가가 어떤 옷을 입을지도 주목했다), 만찬회에서는 스웨덴 국왕과 대각선 자리에 앉아서 노벨상 정찬을 즐겨야 했다. 뿐인가?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비상계엄 사태가 터져 온 언론이 그에 대한 입장을 물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사화되었다.
나라면 나를 위한 음악이 연주되는 내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고, 상을 받을 때 손이 떨려서 메달을 떨어뜨릴까봐 안절부절 노심초사했을 거다. 드레스 같은 걸 골라야 한다니 내 사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의 나라 왕과 마주앉아 밥을 먹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집회에 나가 구호를 외칠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대면 얼어붙을 게 뻔하다.
노벨주간의 화려한 행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노벨상이 대단한 영예인 건 맞지만, 기쁜 일도 일종의 ‘갑작스러운 사고’일 수 있겠구나. 그냥 조용히 글 쓰면서 살고 싶은 사람일 텐데. 앞으로 쓸 작품들도 전과는 다른 주목을 받겠지. 이쯤 되면 노벨문학상 수상자 단톡방이라도 파서 ‘다들 이런 부담감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묻고 싶을 것 같았다. 정작 한강 작가는 그 모든 난관에 담담히 대처해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명언까지 남겼지만 말이다.
살다보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예기치 못한 사태를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겠다며 아날로그 휴일을 비롯해 오만가지 결심을 하고 어설픈 노하우를 만들며 살아왔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들도 생길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속절없이 흔들리고 나부낄 때도 뭔가 붙잡을 게 있기를 바란다. 잠시라도 몸을 피할 곳이 있기를 바란다. ‘읽고 쓰고 공상하고 만드는 일’은 나만의 새끼줄이다. ‘조용하고 자유로운 시간’은 나만의 안식처다. 이것들만은 단단히 챙겨 넣고 인생이라는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