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고 싶어서, 오늘은 아날로그(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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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쓴 글은 결국 책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자녀교육 책이 잘되려면 모름지기 그 자녀들이 성공을 해야 될 텐데, 동생들은 몰라도 일단 나는 세속적 기준으로 볼 때 딱히 성공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엄마의 원고는 쭉 컴퓨터 속에 잠들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가면서 엄마의 자녀교육이 일단락된 어느 날, 엄마를 졸라 파일을 받아냈다. 십여 년 만에 실체가 드러난 원고는 대반전 그 자체였다. 블로그처럼 약 15자 단위로 행갈이가 되어 있어 첫 번째로 놀랐고(책 형태로 만들려면 행갈이를 다 붙이고 문단을 다시 나눠야 한다는 의미였다), 충청도 말씨가 살아 있는 유머러스한 문체에 두 번째로 놀랐다(진지하고 이성적인 분위기일 줄 알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이에게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지 말고(!) 아이가 생활 속에서 책과 놀이를 통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내용이었다는 거다. 엄마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니! 내가 여태 엄마 캐릭터를 잘못 파악했나? 아니면 엄마도 살다보니 변한 건가? 에너지 넘치던 30대 무렵에는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시켜야 할 줄 알았는데, 애들 셋을 키우며 나이를 먹다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건가’ 싶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엄마 글을 다시 훑어보니 도서관 소풍 얘기도 나온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련다. 사실 원고 전체를 직접 편집해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10년 전부터 생각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다른 많은 일들처럼 이 또한 미루고 있다. 이참에 일부분이나마 다듬어봤다.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갖고 도서관으로 소풍을 간다. 이때 집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만들면 아이들은 정말 소풍가는 기분을 느낀다. 김밥 싸며 꽁지를 잘라 주고 치킨 튀기며 치킨 한 놈 집어 주면 아이 입은 함박꽃이 된다.
처음 보는 도서관에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 이 책 저 책 갖가지 책을 넣었다 뺐다 펼쳐보기도 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삐딱하게 끼우느라 낑낑댄다. 여기저기 흥미가 만발해 잠자리처럼 뱅뱅 돌다, 언니·형들처럼 책상 앞에 앉아보는 척도 한다. 그러다 웬만큼 호기심 충족이 되면 엄마 옆에 다가와서 집에 가자고 한다든가 밖에 나가자고 졸라댄다. 이때 아이가 싫증난 기색이 보이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즉시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게 우리 아이에게도 이롭고 조용히 책 읽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
기분전환도 할 겸 거리를 걷기도 하고 아이가 직접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음료수도 뽑아보게 한다. 함께 음료수를 마시며 아이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아이들 얘기를 들어주기가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니다. 다 큰 어른이 무슨 피카츄가 귀엽고 붕붕대는 장난감 자동차가 멋지겠으며 아이의 친구가 보고 싶겠는가. 엄마의 인내에 한계가 따른다면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라. 공부시간에 딴짓하는 엄마가 되는 격이지만 정 버틸 수 없다면 편법이라도 써야 된다. 이야기 속에 아이들과의 관계라든가 왕따 같은 특별 긴급뉴스가 들어 있지 않은 한 인형이 어쩌고 자동차가 저쩌고 하는 주제들은 대화 흐름에 크게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들어주면 된다고 본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보면 점심시간이 된다. 그때 돗자리를 펼치든지 벤치에 자리를 잡고는 치킨이나 피자 김밥 등 준비한 음식을 꺼내기 시작하면 아이는 도서관에서 지루해 했던 일들을 벌써 몇 세기 전의 일로 까맣게 잊고 신나는 소풍놀이에 온 듯 기분이 하늘을 난다. 이렇게 해서 도서관의 첫인상이 아이에게 재미있는 소풍으로 기억되면 다음번 도서관 방문에도 무리없이 따라나서게 될 것이다. 첫 나들이는 말 그대로 도서관의 겉모습만 보여주는 소풍이고 견학이므로 그 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첫날부터 책만 읽히려 욕심을 부리다 다시는 도서관을 못 찾게 될지도 모른다.
도서관 소풍이 여러 번 거듭되면 이제는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먹는 재미 못지않게 책에서 많은 재미를 찾게 되므로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아도 도서관 자체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엄마의 인내가 필요하지만 굳이 인내랄 것도 없다. 도서관에는 엄마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거리가 많다. 신문·잡지·교육·취미 등 궁금했던 내용들을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쓸데없이 아이 옆에 붙어서 아이 책 읽는 것 참견하며 서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엄마에게 유익한 여러 정보들을 찾아 읽자.
알고 보니 도서관 소풍은 방학 동안 할 일이 없어서 간 게 아니라 ‘아이를 책과 친하게 해주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치킨과 김밥으로 유인한(?) 거였다. 이렇게 계획적일 수가! 그밖에도 엄마 글에는 아이들이 책을 찢고 뜯고 어질러도 마음대로 놀게 내버려두라든가, 과자봉지나 간판 등 일상적인 물건들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한글을 가르쳐보라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엄마가 전하려던 메시지 자체보다 글 속에 숨어 있는 엄마의 상상이나 말투가 더 재밌었다.
씨앗을 심고 물 주고는 당장 흙 뒤집어보고 “요놈의 씨앗아 물 줬으니 빨리 눈 떠! 빨리 껍질 벗고 나오란 말이다!” 하면 듣고 있던 씨앗은 “워이구! 졸려 죽겠는데 성질도 급허기는!” 하고 눈 뜨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아이도 때가 돼야 눈도 뜨고 귀도 열린다. 하나를 가르쳤다고 그 즉석에서 컴퓨터에 입력하듯 아이 머릿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계나 컴퓨터가 하는 일이다.
‘테레비’와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이를 책상의자에 찰떡같이 붙여놓고 “지발! 공부 좀 혀 이눔아!” 하고 벌레 씹은 얼굴로 다그친다 해도 그 효과는 오래 못 갈 것이다. 그 얼굴을 고수하고 있다가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 입이 한쪽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거니와, 내 천川자 주름만 늘 것이고 보톡스 맞을 형편도 안 된다. 아이는 기회를 노리다가 엄마 얼굴이 펴질 때쯤 감독이 느슨해졌음을 확인하고는 “아싸! 가오리!”를 외치며 테레비 앞으로 컴퓨터 앞으로 줄달음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아이들 손을 잡고 넓은 들로 산으로, 쏟아지는 전자파와 콘크리트 정글을 뒤로하며 가족과 함께 쿨하게 나서자.
그러고 보면 엄마와 나의 사고방식이 신기할 만큼 비슷하다. ‘이렇게 해보니 이래서 좋더라, 너도 한번 해봐!’라고 권하고 싶은 욕구*가 있달까? 엄마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도서관 소풍을 가보니 이래서 좋더라’고 썼듯이, 나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아날로그 휴일을 보내보니 이래서 좋더라’고 쓰고 있다. 엄마가 ‘테레비와 컴퓨터’를 경계하며 도서관이나 유원지로 소풍을 떠났듯 나도 그러고 있다. 20년 넘게 엄마와 떨어져서 한껏 내 멋대로 살아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비슷해졌는지 모르겠다. 부모의 영향이란 참 희한하다.
(* 다만 내 글에서는 ‘너도 한번 해봐’ 부분을 되도록 빼려고 하는 편이다. 나에게 좋았던 방법은 나에게만 좋을 수도 있고, 내 책은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에세이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나도 한번 글을 써볼까?’라든지 ‘나도 한번 핸드폰 없이 산책을 나가볼까?’ 같은 생각을 하고, 실제로 해보니 정말 좋았다면 뿌듯할 것 같긴 하다.)
얼마 뒤, 일부러 평일에 본가에 내려갔다. 어릴 적 도서관 소풍으로부터 30여 년이 흘러, 마흔이 넘은 내가 일흔을 앞둔 엄마와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냉장고에 있던 주스를 챙기고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반숙란을 샀다. 엄마는 연두색, 나는 까만색 크로스백을 나란히 멘 채로 본가 근처 도서관까지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가벼운 나일론 크로스백을 선호하는 취향조차 닮아 있었다. 나는 가방 무게를 최대한 줄이려 애쓰는 편인데 엄마 가방은 늘 뚱뚱하고 없는 게 없다.
얼마 안 되어 도서관에 당도했다. 아담한 건물을 텃밭과 꽃밭이 에워싸 아늑해 보였다. 엄마는 초보 도슨트처럼 약간 어색하게 “여기는 책 보는 데”, “여기는 비디오 보는 데”, “여기는 공부하는 데”라며 각 공간을 소개했다. 엄마는 주로 꼭대기 층 열람실에서 영한대역문고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헌책방에서 샀다는, 표지는 빨갛고 본문은 누렇게 바랜 옛날 전집이다. 엄마는 익숙하게 사물함에서 방석을 꺼내 앉고, 나는 엄마 옆자리에서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그 뒤로도 본가에 내려갈 때면 종종 엄마와 도서관에 간다. 평일 오전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조용한 열람실에서 나란히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엄마는 “껌 주래?”, “귤 주래?” 하며 없는 게 없는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준다. 정오 무렵이 되면 햇볕이 지나치게 잘 드는 휴게실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는다. 집에 오다가 마트에 들러 장을 보기도 한다. 어릴 적의 도서관 소풍을 생각하면 지난 30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엄마와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