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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08. 2017

실습보고서

1. 실습


접수 담당 깐따삐야입니다.


실습 기간은 원하는 만큼 기입하시면 됩니다. 옛날엔 60~70년 정도가 유행이었는데 요즘엔 패기 있게 100년 이상 지르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개인적으로 30년 미만의 요절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 번뿐인 실습인데 너무 짧게 다녀오면 아깝잖아요.


실습 조건은 세 가지만 선택 가능하시고요. 나머지는 랜덤입니다. ‘행복’이나 ‘건강’처럼 광범위한 조건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한참 후)……


의사 아버지, 뛰어난 기억력, 끝내주는 필력을 선택하시겠다고요? 좀 더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의사 아버진데 폭력을 휘두르거나, 기억력은 뛰어난데 응용력이 없다거나, 필력은 끝내주는데 필화사건에 휘말려 절필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운명의 장난이자 선택의 딜레마죠.


……(또 한참 후)……


다 작성하셨으면 이리 주세요. 처리 완료까진 3~4일쯤 걸립니다.



2. 복습


상영실 박정식입니다.


죽기 직전엔 지난 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 하죠? 당신도 방금 경험했을 텐데요.


주마등은 사실 티저 영상에 불과합니다. 티저가 끝나면 본편이 시작되는데, 러닝타임은 실습기간과 정확히 동일하답니다. 100년 산 사람은 100년짜리 영상을 시청하는 셈입니다. 치욕적인 흑역사도, 지루했던 암흑기도, 생애 최고의 순간들도, 관객으로서 다시 한 번 직면하는 겁니다. ‘망각의 강’ 따윈 없습니다. 살면서 망각했던 것들조차 죽은 뒤에는 싹 다 기억해내게 됩니다.


영상이라고는 하지만 스크린 같은 2차원 화면이 아니에요. 완벽한 360도 VR 영상이라고나 할까요? 실습했던 공간에 다시 들어간 것처럼 모든 게 입체적으로 재생됩니다. 첫 걸음마를 뗀 방바닥 무늬가 어땠는지, 그때 라디오에서 어떤 방송이 나왔는지, 가족들 하나하나는 뭐라고 말했는지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겁니다. 그 꼬마가 어떻게 늙어 죽었는지 결말까지 다 아는 상태로요.


한 가지 고약한 점이, 영혼은 잠이 없는데 인간은 매일 잠을 자잖아요. 뒤척이며 잠든 모습을 매일매일 몇 시간씩 지켜보는 기분이 어떨 것 같나요? 꿈 영상이 함께 보이긴 하는데, 아시다시피 꿈꾸는 시간은 수면시간의 일부분에 불과하죠. 그래도 너무 겁낼 건 없어요. 복습이 진행될수록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지거든요. 불면증 환자처럼 생각하다 날새는 일이 비일비재할 겁니다.


자, 어때요. 흥미롭나요, 끔찍한가요?


당신 인생에는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픈 장면이 많나요, 눈 감고 귀 막고 싶은 장면이 많나요?



3. 입학


복습을 마친 여러분 환영합니다. 교장 김봉숙입니다.


오랜만에 북적이는 곳에 모이니 기분이 얼떨떨하죠? 이제야 진짜 저승에 왔구나 실감이 날 테고요. 저승치고는 너무 학교 운동장 같아서 이상하기도 할 테고요. 자기 임종을 보자마자 여기로 끌려와 감정 수습이 안 되는 분들도 있겠죠. 잠시 숨을 돌리시고요.


여기는 한국어기반 학교입니다. 한국어를 모어로 썼던 영혼들이 모인 곳이죠. 원래 저승에서는 영혼공통어를 사용했었지만, 요즘 학계 추세가 이승에서 경험한 문화를 가능한 한 살리자는 쪽이어서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할 일은 실습보고서 작성입니다. 나이별로 A4 1장씩 실습과정을 요약하세요. 100년 산 분은 100장, 20년 산 분은 20장 쓰면 됩니다. 장당 최소 1000자 이상은 써야 합니다. 시의 경우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잘 쓰기 어려운 장르지만요.


보고서를 완성하면 여기 있는 심사담당교수가 합격과 불합격을 가릴 겁니다. 합격하면 졸업증을 받아 이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졸업 후의 진로는 다양합니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천국에 갈 수도, 환생을 할 수도,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 교수진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로 갈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도 교수진들은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가보면 알게 되겠죠.


질문 있습니까?


보고서 양식이 따로 있냐고요? 양식은 따로 없습니다. 합격 예시문을 보여달라고요? 예시문 공개는 곤란합니다. 자기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시간도 많고 종이도 많으니 잘 생각해서 여러 버전으로 써보세요. 다만 단순한 나열식 구성은 합격한 예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 오늘까지 복습하신 영상은 지하 3층 영상실에서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1차 복습 때와는 달리 필요한 부분만 검색해서 돌려볼 수도 있으니 많은 이용 바랍니다.


지금부터 교실을 배정하겠습니다.


오늘 복습을 마치고 입학한 714명 가운데 생일이 1월인 분은 1반, 2월인 분은 2반…… 12월인 분은 12반으로 가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승에는 한국어기반 학교만 해도 수천 수만 개가 넘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학교에 방문해 생전의 지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보고서는 뒷전으로 여기저기 헤매 다니기만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적어도 하루 한 장은 어떻게든 써서 제출해야 합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이네요. 죽으면 쉴 줄 알았는데 복습에 보고서에 진로 운운하니 기가 막히시겠죠. 하지만 여러분은 스스로 실습을 택한 영혼들입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기만 하는 영혼보다는 뭐라도 할 일이 있는 영혼이 낫습니다. 보고서를 잘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천국에 가거나 열반에 들 가능성도 없지 않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그럼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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