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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ug 04. 2017

병든 18번지


1.


이십사시 아프구 난리동 18번지에는 여덟 식구가 산다. 비염 할매, 디스크 여사, 변비 장군, 이란성 쌍둥이 위염과 식도염, 우울증 청년, 근시 소녀, 충치 꼬마가 바로 그들이다.


18번지는 낡아빠진 반지하인데, 1층도 2층도 없이 오로지 반지하뿐이다. 평범하게 1층으로 지었으면 될 것을, 쓸데없이 땅을 파서 반지하로 만든 것이었다. 신석기시대 움집과도 같은 구조로 인해 벽에는 사시사철 곰팡이가 피고, 홍수라도 나면 어김없이 물이 들어왔다. 집에서는 언제나 부슬부슬 모래 떨어지는 소리, 빠지직빠지직 기둥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덟 식구들에게는 이 집만큼 쾌적하고 편안한 곳이 없다. 더럽지만 넓어서 마음껏 활개 치며 지낼 수 있고, 맵짠단 법칙을 철저히 지키는 음식이 끊임없이 공급된다. 위염과 식도염 남매는 밥때가 아니어도 언제나 식탁에 붙어 있었다. 별말도 없이 마주보고 앉아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쥐고, 한 손으로는 식량 속에서 MSG만 쏙쏙 골라내 오독오독 씹는 것이었다.


모두가 집순이 집돌이였다. 피곤하게 집밖으로 나다니는 식구는 하나도 없었다. 직장에 다닐 필요도, 학교에 가거나 스펙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단순한 백수 식충이만은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들은 모두 호텔리어다.




2.


18번지 철제 현관문 위에는 <호텔 18번지>라는 네온사인이 붙어 있다.


호텔 18번지의 수많은 객실에는 목감기, 무좀, 대상포진, 중이염 등등의 개성 강한 여행자들이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달씩 묵어간다. 이곳의 자극적인 조식과 으스스한 인테리어는 의외로 인기가 높다.


여덟 명의 호텔리어들은 마음 내킬 때마다 객실과 손님들을 관리한다. 유일하게 부지런한 디스크 여사만은 지팡이를 짚은 채로 매일 일한다. 디스크 여사의 담당업무는 호텔의 나무 기둥을 도끼로 조금씩 뽀개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그 일이 끝나면 객실들을 순회하며 쓰레기를 적당히 뿌려 장식하고, 손님들 식사에 아질산나트륨과 액상과당, 캡사이신 등 필수첨가물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체크한다. 홍수가 나서 물이 들어오면 물놀이가 가능하도록 튜브와 오리발을 준비한다.


호텔리어들의 서열은 입주 순서대로 정해진다. 사장은 충치 꼬마다. 35년 된 호텔에 30년 전 입주했으니 단연코 최고참이다. 이 집에 처음 들어오고부터 비염 할매가 오기까지, 무려 7년을 홀로 보냈다고 한다. 때때로 기관지염, 수두, 골절 따위의 손님이 찾아오긴 했지만 모두 뜨내기에 불과했다. 그때만 해도 호텔 18번지는 꽤나 멀쩡하고 산뜻했었다.


충치 꼬마 사장은 늘 검은 옷을 입고 꼬질꼬질한 흰색 소파에 파묻혀 뽀로로를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직원들에게 생떼를 쓰거나 한다. 그 생떼를 주로 들어주는 이는 사장 비서이자 최하위 막내인 우울증 청년이다. 우울증 청년은 원래 티눈 청년이었는데, 이곳에서 비서이자 잡일꾼, 호구, 동네북, 무급인턴, 전화담당으로 일한 지 38일 만에 우울증 청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일하게 청년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서열 두 번째인 비염 할매뿐이다. 두 번째라지만 사실상 실질적 경영인이나 마찬가지다. 유능한 2인자가 으레 그렇듯, 비염 할매 역시 충치 꼬마를 개무시한다. 그런 연유로 비염 할매와 우울증 청년은 공공의 적 앞에서 한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호텔 18번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시나브로 닳아가는 곳이지만, 요 며칠은 여느 때와 달리 뒤숭숭했다. 달방을 살던 치질 군이 정체불명의 킬러들에게 강제로 끌려 나간 것이다.


빨갛고 조그만 치질 군은 꺼멓고 커다란 변비 장군과 똑 닮아 온갖 루머를 불러일으켰다. 헤어진 친부를 찾으러 왔다는 게 첫 번째 루머, 그 친부가 변비 장군이라는 게 두 번째 루머, 이중스파이였던 변비 장군을 처단하기 위해 친아들임을 숨기고 운명의 잠입을 시도했다는 게 세 번째 루머였다. 그러나 정작 변비 장군은 치질 군의 아련한 표정을 보고도 뚱한 얼굴로 읽던 신문을 마저 읽곤 하는 것이었다.


사실 변비 장군 이중스파이설을 퍼뜨린 건 추리소설 마니아인 근시 소녀였다. 퍼뜨렸다기엔 좀 억울한 게, ‘설마 이러쿵저러쿵한 거 아냐?’ 하고 농담처럼 흘린 말이 일파만파 번져 루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기야 대부분의 루머가 그런 식으로 퍼지긴 하지만.


그 때문에 한동안 근시 소녀는 변비 장군과 마주칠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변비 장군은 근시 소녀를 보고도 똑같이 뚱한 표정일 뿐이다.


치질 군이 끌려간 뒤 근시 소녀는 치질 군의 정체와 변비 장군의 정체, 정체불명의 킬러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치질 군이 쓰던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나쁘던 눈은 더 나빠졌고, 증거물은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4.


18번지 옥상 쓰레기더미 속에는 낡아빠진 라디오가 하나 버려져 있는데, 거기서는 매일매일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프로그램 제목은 구태의연하게도 ‘18번지 생각’. 내용 또한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다.


“치질 수술이 이렇게 끔찍할 줄이야…… 요즘 충치도 심상찮은데 어쩌지…… 신경치료가 치질 수술보다 더 아플까 덜 아플까…… 금니 씌울 돈도 없는데…… 이건 뭐 온몸에 성한 데가 하나 없잖아…… 벌써부터 이렇게 만신창이가 됐으니 앞으로 남은 평생 어떻게 살아간담…… 아니 그런데 벌써 세 시라니…… 내일 출근은 어쩌지…… 때려치워버릴까…… 한 1년 요양하면 괜찮아질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잠 깬 거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같은 시각 로비에서는 또 한 손님이 체크인 수속을 밟고 있다.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불면증인데요.”


“좋습니다, 29호실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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