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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Sep 23. 2017

가로로 여섯 뼘 세로로 열 뼘

1.

그녀의 고시원 방은 가로로 여섯 뼘, 세로로 열 뼘이다. 그녀는 네모난 공간만 보면 자신의 방 넓이와 비교해 보는 버릇이 있었다. 당구대라든지, 큰 문짝, 친척집 식탁, 소풍용 은박돗자리 등등.


언젠가 성공해서 부자가 되면,

가로로 여섯 뼘 세로로 열 뼘짜리 원목 책상과

가로로 여섯 뼘 세로로 열 뼘짜리 책꽂이 여러 개와

가로로 여섯 뼘 세로로 열 뼘짜리 냉장고와

세로로 여섯 뼘 가로로 열 뼘짜리 남향 창문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녀는 막연하게 주차장의 한 구획이 그녀의 방 넓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은 우연히 아무도 없는 주차장을 발견하고는, 눈치를 살피며 쪼그리고 앉아 재빠르게 한 뼘 두 뼘 손을 놀려 재 보았다. 주차구역의 넓이는 무려 가로로 열한 뼘, 세로로 스물다섯 뼘이나 되었다. 그녀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차라는 게 이렇게 큰 물건이었나. 그녀는 새삼 놀랐다.


주차장에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1톤 트럭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자국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며 짐칸의 넓이를 재 보았다. 가로로 여덟 뼘, 세로로 열네 뼘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 친구는 질색했다.


하여간 넌 지지리 궁상 좀 그만 떨어라. 그리고 주차장 넓이를 손으로 재는 멍청이가 어딨냐. 걸음이나 발 크기로 재면 되잖아. 초등학교 1학년 때 길이 재기 안 배웠니. 책상은 뼘으로 재고 교실 폭은 걸음으로 재고 큰 나무 둘레는 양팔로 재고 이런 거 안 해봤냐고.


어쩐지 난 뼘 단위가 제일 느낌이 와서.


빨리 그놈의 방을 나와야 네가 그만 옹졸해질 텐데.



2.

지옥은 흔히 보는 지옥도처럼 버라이어티한 곳이 아닐 것이다. 의외로 극히 단순하고 반듯한 모습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코인노래방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밀폐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각자의 탬버린을 치고 각자의 비명을 지르는 곳, 아무도 없는 복도에선 그 모든 노래와 쇳소리와 찢어지는 고음이 뒤섞여 와글거리는 곳. 뒤섞인 소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곳.


그녀는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갈 리 없다고 쭉 생각해 왔으므로, 지옥에서 잘 적응할 방법도 여러 가지로 궁리해 보곤 했다. 코인노래방 지옥이 조금 덜 지옥적이려면 일단 노래를 멈춰야만 한다. 벽에 귀를 대고 옆방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본다. 운이 좋아 가사와 멜로디와 그만의 삑사리를 알아듣게 된다면, 조금 안심이 될지도 모른다. 피식 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옆방 사람이 그녀의 침묵을 느끼고 자신도 노래를 멈춘다면? 그런 식으로 도미노처럼 차츰차츰 노래와 비명과 탬버린 소리가 모두 멈춘다면? 한 천 년쯤 걸려서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면?


그러면 눈치게임이라도 하듯, 누구 한 사람이 먼저 소리를 낼 것이다. 가령 압둘이라고 해보자. 압둘이 그 침묵 속에서, 대체 여기가 어디냐고 소리를 치든, ‘쉬즈곤’을 부르든, 삼삼칠 박자로 탬버린을 치든 할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예컨대 김미숙이 이어받아 압둘의 아랍어를 유창하게 통역하든, ‘남행열차’를 부르든, CCTV에 대고 다 함께 욕이라도 해보자고 제안하든 할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그러면 또 누군가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면 그 지옥은 훨씬 견딜 만해질 것이다. 90년대 이후로 신곡 업데이트가 안 되는 끔찍한 곳이라 해도, 노래 대신 대화가 시작되면 지겹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닐까? 어쩌면 입을 다물고 남의 얘기만 듣는 게 답답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좀처럼 자기 차례가 오지 않거나, 말할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낄 수도 있다. 누군가가 7년 만에 돌아온 자기 차례에 말한다. 침묵을 강요하지 말라! 남이 알아듣든 말든 각자 마음대로 노래하던 때가 나았다! 노래방에서 노래도 못 하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란 말인가!


동조하는 목소리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노래와 비명들. 그렇게 또 한 천 년쯤 계속되는 소음.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침묵의 천 년. 다시 소음의 천 년. 침묵의 천 년. 소음의 천 년. 침묵의 천 년……


바로 그런 게 지옥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3.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상상했던 바로 그 지옥에서 눈을 떴다. 어두운 방에는 오색 조명이 부지런히 돌아가고 벽에는 문이 없었다. 윤종신의 ‘좋니’, 자우림의 ‘일탈’, 김수희의 ‘남행열차’ 등등이 어지럽게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는 천장의 CCTV를 무심히 올려다보고는 아무 의욕도 없이 노래방책을 끌어당겼다. 딱히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노래방에서 할 일은 노래 또는 침묵뿐이니까.


책을 펼치자,


……어라?


온통 흰색이었다. 촤르륵 넘겨 봐도 몽땅 하얀 백지뿐이었다. 가로로도 세로로도 두 뼘이 안 되는 하얀 종이에 알록달록한 불빛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펜. 펜이 필요해. 그녀는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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