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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08. 2022

엉덩이를 들썩이는 신호

깜깜한 도로 위엔 좌회전 깜빡이만이 불안하게 비춘다. 가로등 없는 차도 위엔 우리 자동차 외엔 없는 듯하다. 시내를 지나 시골길로, 그리고 산길로 들어선다. 일 차선 도로의 양옆을 나무가 감싸면서 더욱 어두워진다. 숲의 그림자에 압도되고, 두려움에 압도된다. 자동차 전조등 하나에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 이곳에 도착한 이는 우리뿐인 것 같다. 우리, 오늘 밤 무사히 잠을 잘 수 있을까? 길에서 자는 건 아닐까? 

이곳은 경주. 신라의 천년고도이자 왕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는 곳. 그러나 우리는 산길을 헤매고 있다.

     

여행은 어떻게 시작될까? 내 경우에는 일상이 지칠 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 그냥 쉬고 싶을 때, 그리고 아무 날도 아닐 때도 여행의 신이 찾아온다. 여행의 신은 산들바람처럼 찾아와 엉덩이에 바람을 호호 불어준다.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인다. 뇌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지고, 곧 온몸으로 신호를 보낸다. 지금은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니, 준비를 하라고.


경주도 그랬다. 가벼운 바람처럼 시작된 여행. 

<알쓸신잡-경주 편>에서 김영하 작가가 황리단길의 한 피자집에서 “햇볕마저 바삭하네요.”라며 맥주와 함께 피자 한 쪽을 깨물던 모습을 보며 시작됐다. 경주에 가면, 선명한 하늘 아래 느긋하게 왕릉이 펼쳐져 있고. 경주에 가면, 햇볕처럼 바삭한 피자를 깨물 수도 있고. 경주에 가면, 경주에 가면, 그냥 모든 게 해결될 것 같다. 경주만 가면. 옆구리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 3시간 전. 저녁 6시. -     


“미리 좀 얘기를 해주지. 이렇게 갑자기 어떻게 가.”

“어제까진 시간이 날 줄 몰랐어. 숙소는 가면서 예약하자. 어디 가고 싶어?”

워낙 갑작스레 여행을 시작하는 우리지만, 경주 여행은 특히나 갑작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목요일 저녁, 일찍 퇴근한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래, 여행은 갑작스러울수록 즐거운 법이지. 이미 여행의 신이 들어온 엉덩이가 기회를 놓치진 않았다. 그동안 옆구리를 간질이던 두 글자를 슬며시 꺼내놓는다.


“그럼, 경주 갈까?”

“경주? 어디 보자. 3시간 반이면 가네. 그래, 경주 가자.”


그렇게 우린 대화 5분 만에 여행 결심을 세웠고, 30분 동안 여행 가방을 쌌으며, 경주까지 가는 3시간 30분 동안에 숙소 예약 및 여행 코스를 짰다. 빠르게 진행되긴 했지만 익숙한 패턴이다. 카시트에 앉아 자고 있는 유은이 너머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내일은 하늘이 맑기만을 바랐다. 바삭한 햇빛, 바삭한 피자. 필히 맑아야 했다.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급하게 예약한 것치고 숙소는 그럴 듯했다. 앞마당이 넓은 고즈넉한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밤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한옥의 마당은 아침에 보니, 귀여운 디딤돌이 놓여 있고, 곳곳에 작은 전통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방은 넓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따뜻했다. 조식 시간에는 다 함께 온돌방에 모여앉아 토스트를 구워 먹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새 유은이는 또래 친구를 만나, 한옥 툇마루에 앉아 맥포머스를 함께 하기도 했다. 첫 숙소는 괜찮았다. 문제는 숙소가 여기가 첫 숙소이고, 다음 숙소가 또 있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우리의 충동성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 숙소가 나온다. 여행의 신에게 홀려 성급하게 여행을 시작하게 되면 생기는 일. 급히 예약하다 보니, 3박4일 일정을 하나의 숙소로 정할 수가 없어 두 개를 잡게 되었고, 문제의 두 번째 숙소는 석굴암 근처 산속에 있는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자연 친화적으로 보였던 숙소는 가는 길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가도 가도 구불구불한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저녁까지 먹고 난 후에 숙소로 가게 되어, 해는 점차 지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고 나니, 가로등 없는 산길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렸다. 산이라 유난히 비가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도로엔 이정표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의지할 데라고는 전조등과 내비게이션뿐이었다. 이렇게 계속 가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의심이 들 즈음에 자갈이 가득한 공터가 나오더니, 조그만 한옥이 보였다.


“여기가 게스트하우스인 건가?”


주차장도 따로 없어, 언덕길에 간신히 주차를 했다. 낑낑거리며 자갈밭에서 캐리어를 끌고 있는데, 또 다른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뭐야, 이게 뭐야?”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 동질감이 들면서, 위화감이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바위로 막혀있는 입구를 지나니, 좁고 긴 형태의 한옥 건물이 나왔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은 우리는 급히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뭐람. 또다시 감탄사만 나왔다. 좁고 긴 한옥 건물에는 작은 방들이 마치 기숙사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방들은 역시 좁은 복도로 이어져 있었고, 방을 들어가는 입구는 문이 아닌 창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멍이 작았고, 문턱이 무릎 정도에 올라와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불법 개조한 건물이었던 것 같다. 뒤에서 역시 예의 그 감탄사가 나왔다. 

“아니, 이게 뭐야?”     


할머니 방 같은 작은 방은 유은이와 남편과 캐리어와 함께 꼭 붙어 잠을 청해야 했다. 가벽을 어떻게 설치한 건지,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왼쪽과 오른쪽 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누워있으니,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커다란 방에서 함께 잠을 자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왼쪽 방의 밤새 술을 마시며 노는 사람들과는 함께 취해야 할 것 같았고, 오른쪽 방의 싸움하는 듯 소리치는 사람들에게는 왠지 눈치 보는 마음이 되었다. 일찍 잠을 청해야 하는, 아이 있는 집은 우리뿐인 것 같았다. 고요한 산속의 집은 밤늦도록 흥청망청 꽤나 시끄러웠다.     


귀신에 홀린 듯한 밤이 지나고, 아침은 고맙게도 잊지 않고 찾아와줬다. 거의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밖을 나와 보니 생각보다 상쾌했다. 이른 아침부터 새소리가 다양하게 들려왔다. 여러 종류의 새소리를 한꺼번에 듣기는 처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짙푸른 상록수들이 웅장하게 에워싸고 있었고, 아래로는 마을이 아주 멀리 작게 보였다. 석굴암만큼은 산속 깊이 들어온 것 같았다. 


사장님은 마당에서 콩죽과 전을 주셨다. 조식이 제공된다고 했던 게 이거구나. 유은이와 전을 먹으며, 사장님께 “여기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와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안 그래도 섭외 들어왔었는데, TV나오면 여기가 너무 유명해질까 봐 거절했어요.”하시는 거였다. 

돈 주면서 하라고 해도 안 할 ‘나는 자연인이다’ 체험을 돈을 내면서 하게 된 셈이었다. 다시 한번 아찔했다.     

그래도 아직, 내겐 햇볕처럼 바삭한 피자가 남아있었다. 오늘은 피자를 먹으러 황리단길에 가기로 한 날. 깊은 산 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다행히 쾌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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