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 뒤의 허전함

by 시에스타

약속이 없는 토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필라테스를 마치고, 폐문 시간 이후에도 약국에 남아 주변을 정리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고, 급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은 그냥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조제실 뒤편 한쪽 구석에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 약국을 열 때 인테리어 업체에 따로 부탁해 만든 자리다.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국장만의 쉼터이자 서재 같은 곳이다. 책장을 짜 넣고, 작은 책상도 두었다. 처음에는 분명 책을 읽기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공간은 조금씩 성격이 달라졌다. 책보다 약이 늘어났다. 재고로 남겨둔 약들, 당장 진열할 필요는 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 것들, ‘언젠가는 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옮겨둔 약들이 책장을 차지했다. 서재는 어느새 약장이 되었고, 그 변화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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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제대로 쓰려면, 비워야 했다. 개인 물품들, 필요 없어진 서류들, 제약회사에서 받아두었던 오래된 팸플릿들. 다시 볼 것 같아서 따로 보관해 두었던 종이와 소책자들도 꺼내 하나씩 넘겨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어떤 것은 지금 시기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연수교육에서 받았던 자료들, 학회 세미나에서 나눠주던 강의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에는 중요했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자료들이지만, 지금은 책장 한 칸을 차지하는 종이 더미에 가까웠다. 한 번도 다시 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미 답이 되어주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해야 할 약들도 제법 나왔다. 대부분은 반품 처리되지만, 반품마저 안 되는 것들도 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그래도 괜찮다 싶은 일부 약들은 종이 가방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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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마치자 허기가 몰려왔다. 마치 무언가를 많이 소모한 것처럼. 아내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 밤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아들과 무엇을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집에 와서 정하기로 했다. 집 근처 족발집이 떠올랐다. 배달 앱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포장 주문을 했고, 아들이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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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버렸을 뿐인데, 위장까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아들과 둘이서 족발을 놓고 앉아 천천히, 또 열심히 먹었다. 적당한 비계, 돼지 특유의 잡내 없이 잘 삶아진 고기였다. 손으로 뜯어 입에 넣는 단순한 동작이 반복될수록, 배는 빠르게 채워졌다. 밤에는 과식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정리를 하느라 에너지를 썼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의 식사는 필요 이상으로 풍족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소화가 잘되지 않아 침대에 눕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책을 한 권 꺼내 들었지만, 집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몸은 가득 찼는데, 마음은 여전히 정리 중인 느낌이었다. 그때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비웠는데, 왜 이렇게 배가 고팠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급하게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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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비운 것은 물건이었지만, 비워진 건 그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 ‘쌓아두는 것이 안전하다’는 습관,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판단들. 그런 것들이 함께 사라지자, 그 자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잠시 알 수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비운 뒤에 바로 채운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허전함을 오래 느끼지 않기 위해. 음식이든, 일거리든, 약속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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