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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Nov 13. 2022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딸들이 그렇듯이

딸들이 그렇듯이 나도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론자'였다.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고집불통 아빠와  맞서지도 않았다. 가부장 질서에 완전히 순종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거스르지도 않았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다정하진 않았지만 자식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 하셨다. 엄마는 한 때 서울 한복판 백화점에서 옷가게를 하셨지만  또 한 때는 빨간 다라이에 담긴 참기름이나 과일을 이고 다니시며 팔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처럼 고생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부동산보다 복덕방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던 80년대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해서 그 일로 돈을 벌어 다섯 자식 대학교육을 시키셨다. 그때는 동네 아저씨들이나 복덕방을 했었다. 국민학교 5 학년이던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엄마가 창피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안 했다. 나는 동네에서 복덕방 집 딸인 게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나서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물어보았다.


ㅡ아빠가 사업한다고 딸라이자까지 끌어 쓰다가 그걸 못 갚아서 집이며 뭐며 다 놓치고 정릉에서 야반도주를 했잖니. 그 후 몇 년 이 장사 저 장사 다 해봤지만 애들은 많고 들어오는 돈은 적고... 그러다 너네 아빠가 허리를  크게 다치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구멍가게라도 차릴래도 가게 물건 들여놓을 돈이 없더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동산은 가게 얻는 돈만 있으면 되겠더라고... 그래서 가게 딸린 살림집을 얻고 소파랑 탁자랑 책상 들여놓고 복덕방을 시작한 거지...

너네 아빠는  융통성이 없어서 흥정을 못해.  그래도 한문도 잘 알고 필체도 좋아서 서류는 깔끔하게 잘 썼어.

나는 그저 월세든 전세든 집을 팔고 사는 건이든 부지런히 손님들을 데리고 다녔지. 그때 너무 걸어서 내 무릎이 다 닳았나 보다...


지금부터 이십여 년 전 엄마에게 저 얘기를 들었다. 그때 잠이든 어린 딸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끄러웠다.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처럼 대야에 물건을 넣고 팔러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엄마처럼 낯선 이들의 거래를 흥정하면서 걷고 걷고 또 걸을 수 있을까?


마음이 착잡하고 울렁거렸다. 나는 여전히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았지만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론자 였던 것이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결혼할 때도 결혼 후에도 엄마라는 언덕을 채굴해서 내 앞가림을 해야 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이제는 팔순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인 엄마. 그저 많이 아프지 않고 무탈하고 편히 지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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