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발산동 초입에 아파트 있었던 거 기억나니? 그 앞에 새로 지은 양옥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동네 들어가는 길가에서 과일을 팔았어 내가 뭐 장사를 알겠니 옆집 여자가 자기 따라 하라고 해서 그니가 그날그날 담아 주는 대로 팔았지
하루는 다라이에 목판을 걸쳐놓고 복숭아를 팔고 있었어
양복을 입은 점잖은 사내가 와서 어머니 드시게 무른 걸로 몇 개 담아 주시오 하길래 종이 봉지에 담아 내밀면서 고개를 들다가 눈이 딱 마주친 거야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눈을 피했는데 돈을 들고 있는 손이 움찔하는 게 보여 난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이마까지 훅 내려 덮어쓰고 업고 있던 니 막냇동생을 어르는 척 벌떡 일어나서 옆집 아줌마 등 뒤로 숨어버렸어
니 아빠랑 결혼하기 전에 나 좋다던 사람이 있었는데 성실하고 괜찮았거든 눈썹이 진하고 인물도 좋고 멋도 알고 우리 양품점에 와서 넥타이나 와이셔츠를 사곤 했는데 내가 골라주는 디자인을 맘에 쏙 들어했지
어느 날 내게 편지 한 통을 내미는 거야 흰 봉투 앞면에는 자기 이름을 한자로 반듯하게 써놨어 꺼내 보니 자기소개서야 깔깔
고향이 어디고 나이가 몇이고 하는 일은 무엇이고 나랑 사귀어보고 싶고 결혼하면 어머님 모시고 아이는 몇을 두고 어떻게 살고 싶고 그런 얘기를 좋은 필체로 두 장을 써 놨더라니깐
그때가 그러니까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몇 년 안 지났을 때야 내가 니네 외할머니를 모셔야 했는데 그리고 니 외삼촌 학교 공부도 시켜야 했고 그러니 어떻게 사귀자고 한다고 덥석 사귀겠니 정혼할 사람 있다고 하고 편지를 돌려줬지 그 일 이후로는 가게에 오지 않더라고
이름이 뭐냐고? 그걸 어떻게 기억하니 그게 벌써 오십 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인데 복숭아는 언제 팔았냐고? 너 아홉인가 열 살 때쯤일걸 너랑 나랑 삼십 년 차이니까 그때 내 나이가 마흔 막 넘었던 때네
세상에나 마흔 살이라니, 마흔
마흔을 반복하는 엄마 목소리에 복숭아꽃 핀다 바람이 분다 꽃이 흔들린다
팔순의 주름진 손가락으로 껍질을 벗기던 백도에서 단물이 뚝뚝 떨어진다 흘러내린다
그림 -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핀 복숭아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