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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Feb 16. 2022

다시 바람이 되어

늦가을 산책길에 박주가리를 만났다. 어느 유치원 담장을 둘러싼 키 작은 나무들을 타고 오른 덩굴에는 솜털 보송한 연보라색 꽃도 있었고 연두색 열매도 달려있었다. 열매는 새끼손가락 크기로 작았다. 다 큰 박주가리의 열매는 어른 한 뼘 길이 정도로 꽤 길다. 색은 갈색이고 껍질이 딱딱하다. 어린 씨앗 꼬투리를 보면서 겨울이 오면 씨앗이 날리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일주일쯤 지나서 그 자리에 다시 가보았다. 여름내 삐죽하게 자랐던 나무가 단정하게 가지치기가 되어있었다. 나무를 휘감아 오르던 박주가리 덩굴도 잘려 나가고 없었다. 겨울이 오고 코끝이 쨍하게 추운 날, 파랗게 높은 하늘에 은실을 반짝이며 날아오르는 씨앗을 보고 싶었는데 꽃도 덜 여문 씨앗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겨울이 다 지나고 추위도 끝나가는 어느 날, 하늘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자세히 보니 박주가리 씨앗이었다. 근처 나뭇가지에 박주가리 씨주머니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높은 가지였다. 높게 올라 살아남아서 가지를 꼭 붙잡고 있었다. 박주가리의 꽃말은 ‘긴 여행’이라고 한다. 씨앗 주머니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작은 새처럼 가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겨우내 잎은 말라 사라지고 덩굴도 녹슨 철사처럼 뒤틀린 채 나무에 감겨 있었다. 그 끝에 씨주머니가 품을 벌려 씨앗들을 공중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박주가리는 봉숭아처럼 꼬투리를 팡 터뜨려 한 번에 모든 씨앗을 흩어버리지 않는다. 민들레처럼 바람 한 줄기에 휙 씨앗을 날려버리지 않는다. 마치 제 가슴에서 깃털을 뽑아 봄을 지낼 집을 짓는 새처럼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레 날려 보내고 있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즈음 유난히 숨결을 내려놓는 어르신들이 많다. 열흘 사이 벌써 몇 분이 떠나셨다. 연세가 많으니 항상 위태로웠지만, 혹독한 한파가 꽂히던 겨울을 잘 넘기셨던 분들이다. 한고비 넘겼다고 안심하는 새벽 한순간에 떠나신다.    

  

몇 년 동안 많은 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볼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왜 살리지 못했냐는 그런 생각은 아니다.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아직 살아있는 나로서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종교가 있다면 천국이나 극락으로 갈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아직은 죽음 뒤의 그런 세상에 대해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멀리 있는 별은 빛이 지구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그 존재가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단지 무한의 어둠을 뚫고 온 빛만이 우리 눈에 남아 ‘별’이라는 이름이 된다. 이름을 얻어 사라진 것이 다시 살아난다. 아니 어쩌면 ‘별’이라는 존재는 덩어리와 빛 그 모두일 것이다. 그중 덩어리는 없어지고 빛이 우리에게 온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떠난 분들도 몸은 사라졌지만, 그 숨결은 남아 별처럼 우주 어딘가를 향해 갈지도 모른다. 별빛이 왔던 곳을 향해 아주 멀리 가기도 하고 여전히 지구 위에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지구에 남은 숨결의 일렁임이 바람이 아닐까.     


겨울이 지나면 꽃샘바람이 분다. 여기 지구에 남은 숨결이 그 바람에 스며 있을 것 같다. 봄이 오기 전에 땅을 흔들고 하늘을 흔들고 봄 앞의 모든 것을 흔드는 바람이 있어야만 봄에 눈뜨는 생명이 제대로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숨결이 한 생명을 마무리하고 다른 생명으로 스며들기 위한 움직임이 꽃샘바람이 되었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 바람은 겨울 동안 뻣뻣하게 굳어있던 나무를 흔들어 일으킨다. 저 높은 가지에 걸린 박주가리의 씨주머니를 두드린다. 작은 새처럼 생긴 씨앗 주머니를 활짝 열어 씨앗을 날린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바람은 먼저 땅에 내려와 흙을 열고 씨앗을 눕힌다. 씨앗에서 싹이 나올 때 햇볕과 함께 새싹의 등을 밀어준다.      


 사람의 몸을 버리고 바람이 된 그들은 이렇게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새봄의 연둣빛 숨결로 올 것이다.


ㅡ사진출처

쑥국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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