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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May 24. 2023

이제부터 싸라기꽃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저 우체통이 있는 길가에 꽃이 핀 나무들이 있답니다. 나무는 커 봤자 어른 어깨높이지요. 어느 해 검단산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개천가에서 사람 키 몇 배나 되는 크고 멋진 이 나무를 보기는 했지만 그렇게 자란 것은 아주 드뭅니다.


꽃 한 송이는 아주 작아요. 마치 현미나 흑미를 볶아놓은 모양이지요. 요것들은 껍질이 있는 쌀이라서 뜨거운 불에 볶다 보면 껍질이 톡 터져 네 갈래로 벌어지면서 익은 쌀의 하얀 속살이 나옵니다. 그 모양이 꼭 이 꽃을 닮았어요.


꽃은 여러 송이가 모여 송아리를 이룹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쌀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양이고요. 열 개가 넘는 꽃이 모여 한 덩이가 되어도 어른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입니다.


잎은 메추리알보다 조금 큰 새알처럼 생겼어요. 만져보면 딱딱하지도 않고 흐늘거리지도 않아요. 보드라운 하지만 도톰하고 짙은 초록이지요. 딱 오월에서 유월로 넘어가는 햇살을 닮았어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저 우체통이 있는 길가에 향이 가득한 나무들이 있답니다. 꽃은 잘 보이지 않아요. 쌀알처럼 작으니까요. 하지만 향기는 뜸이 잘 든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진하게 피어오른답니다.


어스름 저녁이 되면 더욱 진해져요. 낮 동안 들떠있던 공기에 섞여 같이 들떠 날아다니며 놀던 꽃향기가 밤이 되면 다시 나무로 돌아오거든요. 초여름 저녁 아이들이 골목에서 늦게까지 술래잡기하며 놀 듯이 향기들도 이파리 사이를 숨었다가 나왔다가 하면서 놀지요.


밤이 되면, 이파리마다 꽃향기가 누워 졸아요. 바람이 살짝 불어 잎이 흔들리면 향기도 같이 흔들려요. 그러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깡총 뛰어올라 다른 잎으로 도망가기도 하고요. 아가의 새로 난 젖니처럼 작은 꽃의 향기가 까르륵까르륵 밤을 달콤하게 하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저 우체통이 있는 길가에 핀 꽃향기를 모아 당신에게 보내고 싶어요. 우체통에 넣어서요. 내일 아침 우체부 아저씨는 빨갛고 커다란 네모 통 속에 모인 편지를 꺼내다가 꽃향기를 맡고 어리둥절하겠지요. 당신은 내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번째 골목 첫 번째 집을 지날 때, 물큰 퍼지는 꽃향기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집으로 가겠지요.


내가 보낸 걸 몰라줘서 섭섭하지 않겠느냐고요? 괜찮아요. 저녁밥 먹고 밤이 되면 어쩐지 그 향기가 다시 생각나서 슬슬 동네 산책을 나올 테니까요. 담장에 앉아 기다리다가 당신이 지나가면 얼른 뛰어 내려와 팔짱을 끼고 허리를 감고 귓불을 만지작만지작, 콧등을 간지럽히다가 괜히 기분이 좋아진 당신이 집으로 갈 때 할랑할랑 따라갈 거랍니다.


열매 모양 때문에 쥐똥나무라는 이름이 붙어서 속상해요. 이제는 꽃모양 따라 싸라기꽃이라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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