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정 Jan 20. 2024

이혜숙의 ‘계절을 먹다’


흙담에 기댄 호박 덩굴 같은 이야기들

-이혜숙의 ‘계절을 먹다’



함평에 간 적이 있다. 한옥마을을 갔더랬다. 늦가을이었다. 먹기와 지붕 집들 사이 골목을 걸었다. 어느 집 마당에선 개가 졸고 있었고 다른 집 마당 바지랑대에는 이불 홑청이 널려 있었다. 바람이 오후의 햇살을 한 모금 입에 잔뜩 머금었다가 푸우 뿌려대면 하얀 홑청이 환하게 부풀었다가 주저앉으며 제 몸에 흐린 먹빛의 그림자를 그리며 노는 것이 보였다. 


마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골목은 좁아지고 구불텅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비스듬히 경사가 진 길을 올라가자 돌을 쌓고 틈 사이에 황토를 이겨 넣은 오래된 담장이 나왔다. 여름내 자란 호박 덩굴이 낮은 담장을 넘고 있었다. 늦가을이었지만 호박은 아직도 자라는 중이었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는 연푸른 애호박이 곤지곤지 잼잼을 하는 애기 주먹처럼 달려 있었고 그 아래 줄기에는 두 손에 안길 제법 자란 단단한 호박이 담장에 기대 있었다. 땅바닥 가까이 누런 잎들 뒤에는 머릿수건을 쓰고 치맛자락을 모으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는 아낙처럼 낮고 둥근 등허리의 늙은 호박이 앉아 있었다. 


이혜숙의 책, ‘계절을 먹다’를 읽는 것은 이런 길을 작가와 같이 걷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를 데리고 같이 마을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살갗 뽀독한 애호박을 뚝 따다가 된장을 끓여내고 솜털 보송한 호박잎을 끊어다가 밥 위에 쪄내고, 쓸만하게 자란 호박으로 눈길을 옮기면서 호박 부침도 지글지글 만들어 준다. 독자가 글맛에 입맛을 다시면서 눈앞에 삼삼한, 있지도 않은 호박 지짐을 맛보는 게 끝나기도 전에 작가는 이미 늙은 호박을 집 안으로 들여놓는다. 그리고 겨울 어느 날을 불러 와 딱딱한 호박을 갈라 호박 속을 파내고 뚝뚝 썰어 끓여 겨울 별미인 호박죽을 내민다. 


이야기가 호박 넝쿨처럼 뻗어나간다. 이야기는 넝쿨에서 자란 호박잎처럼 풍성해진다. 어떤 이야기는 초여름 새로 자란 덩굴손처럼 싱싱하고 다른 이야기는 늦가을 시들어가는 누런 잎처럼 애잔하다. 모든 이야기의 뿌리는 하나다. 고향 사람들과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 


작가의 이야기를 글로 들으면 맞장구를 치고 싶어진다. ‘칠게’에 대한 글을 읽을 때 그랬다. 나 아주 어릴 적 먹었던 게장이 떠올랐다. 그때의 게장은 지금처럼 커다란 꽃게로 담근 것이 아니었다. 작은 게에 간장을 부었다. 정릉 집 마루에 앉아 외할머니랑 둘이 점심을 먹으면서 다섯 살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게다리 하나를 들고 간장을 쪽쪽 빨며 밥을 먹었다. 커다란 다라이에 담아 그릇에 담아 팔았다는 바로 그 칠게를 서울내기인 나도 안다고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자식들 한참 잘 먹을 때 친정서 제사상에 놓였던 웃봉지 뗀 과일을 들고 왔다는 페북 글을 보고는 나, 이 도령 춘향이 업고 노는 사랑가 한 대목에서 수박 웃봉지 뗀다는 말 들었다고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어느 날인가는 몸이 벌떡 일으켜져 따라하기까지 했다. 쌀뜨물에 멸치 우려 국물을 낸 겨울 된장 뭇국이 그랬다. 아침에 퇴근해 기진맥진해 멀거니 페북을 들여다보다가 글로 끓인 국 한 사발에 힘을 얻고 냉장고를 뒤져 내 먹을 국을 끓였다. 뜨건 국물로 헛헛한 속을 뎁혔다.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던 국을 생각하면서 글도 한 냄비 끓였다. 


눈으로 읽는데 머리가 깨어나고 몸이 일으켜지고 뱃골에 힘이 생긴다. 단지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마음이 넓어진다. 따뜻해진다.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경우와 도리를 배우게 된다. 특히 엄하신 증조할머니가 이웃의 허약한 아이를 실솥 옆에 앉혀놓고 번데기를 먹이는 대목에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과서 없이도, 철학책 없이도 배우게 된다. ‘어서 먹어라. 오줌 누러나 가고 꽉 앉았거라. 실솥 옆에 며칠 있으면 사람 된다’는 구절에 눈이 매워졌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읽으면서 사람 구실을 깨닫게 하는 부분이 아주 많다. 


책을 다 읽고 우연히 책 표지 안쪽을 보았다. 작가의 고향이 ‘함평’이란다. 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함평 한옥마을 동네 골목이 생각났었나 보다. 오래전 늦가을 햇살이 느른하게 퍼지는 골목을 지금 다시 걷는 기분이다. 등짝이 따뜻하다.



#이혜숙


#글항아리


#계절을먹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는 말로 써진 아는 맛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