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애인은 나,
오늘은 나를 대접합니다
지난해보다 따뜻한 가을이다. 따뜻해서 국화는 늦게 피었다. 여름꽃은 빨리 떠났고 가을꽃은 쉬이 오지 못한다. 살아있는 것은 새로운 철에 저를 맞추려 애쓴다. 애쓰다가 스러지기도 하다.
요양병원의 가을은 떠나는 숨결들이 많아진다. 찬 바람이 불면 가지 끝에 매달린 마른 나뭇잎이 떨어지듯 가랑가랑 숨소리가 말라가던 목숨이 떨어진다. 투둑투둑 밤비가 병실 유리창을 두드린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다 땅으로 떨어진다. 흐득흐득 몰아쉬던 숨결 비를 타고 같이 흐른다. 대지로 돌아간다.
그러니 일이 많아진다. 일이 많아지니 예민해지고 잠을 못 잤다. 팽팽한 긴장이 남아 잠을 얇게 만든다. 입맛도 없다. 대충 눈에 뜨이는 것으로 입을 축이고 배를 달랜다. 창밖 부신 햇살이 눈물겹다. 쉬는 날이 되니 몸이 늘어진다. 멍하다.
피곤함에 지쳐 열두 시간을 자고 나서 일단 커피를 한 잔 내렸다. 검은 액체가 투병한 잔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니 잠이 깬다. 진한 커피 향이 코를 스친다. 콧속으로 흘러들어온 향이 뇌를 마구 두드린다. 머리를 깨운다. 뱃속에서 새로운 소식이 올라온다. 너 어제 한 끼만 먹었어. 꼬르륵 꼬륵.
오늘은 나를 대접해야겠다. 나를 먹여야겠다.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무엇으로 나를 대접할까 생각해본다. 냉장고가 지이잉 모터 소리를 낸다. ‘생각하지 말고 나를 열어 봐!’ 냉장고 문을 연다. 맨 위 칸에 놓인 빵이 보인다. 두 번째 칸에는 미트로프가 있다. 그리고 다음 칸에는 달걀이 있다. 새싹채소도 있다. 나를 어찌 대접할 것인지 머릿속에서 먼저 상을 차린다. 이제 시작해 보자.
프라이팬을 달구고 버터를 두른다. 연노란 버터가 사르르 녹는다. 달걀을 하나 깬다. 프라이팬 가까이에서 살그머니 흰자부터 흘려 넣는다. 투명하던 흰자가 살짝 흰색으로 변한다. 숨을 딱 멈추고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흰자 위에 얹는다. 불을 약하게 하고 기다린다. 프라이팬에 아침 해 뜬다. 빵도 팬에 같이 얹어서 굽는다. 바삭바삭 낙엽 냄새가 난다. 가을 아침에 맞게 구워졌다. 미트로프도 한 조각 썰어 데운다.
새싹채소를 씻어 우묵한 접시에 담는다. 연한 간장 물과 들기름을 뿌려 먹을 계획이다.먹던 들기름이 다 떨어졌다. 새 병을 찾아 뚜껑을 연다. 마개를 따는데 고리만 달랑 떨어진다. 난감하다. 현실은 이렇게 늘 상상과 다르다.
끝이 뾰족한 물건을 찾아본다. 젓가락으로 쑤신다. 틈이 안 생긴다. 칼로 도려내 볼까. 그건 좀 과하다. 기름병 마개 열자고 칼을 들다니 우습다. 이쑤시개는 뾰족하지만 단단히 봉해진 플라스틱 틈을 뚫지 못하고 제 몸이 부러진다. 샐러드용 포크 끝으로 살살 틈을 만든다. 현실은 이렇게 별거 아닌 문제도 적당한 답을 쉽게 찾지 못하고 낑낑거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겨우 마개를 제거했다. 기름을 새싹채소에 뿌린다. 신선한 들기름 향이 번진다. 커다란 접시에 노른자가 탱글탱글한 달걀을 놓고 빵과 고기를 놓는다. 커피도 한 잔 같이. 이런 아침에 어울리는 음악도 틀고 약병에 담긴 국화도 작은 식탁으로 옮긴다.
국화도 테이블도 노란 가을 아침, 나보다 먼저 햇살이 앉아있다. 어쩌면 오늘 아침은 피곤한 나를 달래주려고 햇살이 차린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