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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Apr 13. 2022

봄바람은 달다

     

중앙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길다. 계단을 올라가다 숨이 차 올 때쯤 잠시 쉴 수 있는 곳이 나왔다. 오래된 나무 벤치가 몇 개 있고 그 뒤로는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들이 의자 쪽으로 팔을 뻗고 있다. 이렇게 꽃잎이 흩날리는 쾌청한 봄날이면 학생들은 친구들과, 혹은 연인과 벤치에 앉아 봄을 즐겼다.



관에서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하던 하영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혼자 벤치에 앉아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교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빵을 다 먹고 일어서려는데 벤치 끝에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책을 들어 겉장을 펼쳐보니 학교와 이름이 보였다. '서린 대학 사진학과?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네.' 하영은 책을 도서관 분실물 보관실에 맡길까, 아니면 그냥 있던 자리에 둘까 잠깐 망설였다.



"아, 그거 제 책이에요. 보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학생이 뛰어오더니 하영에게 큰소리로 꾸벅 인사를 한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늘색의 얇은 면 스웨터를 입고 있다.



진서는 책을 찾아줘서 고맙다고 하영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한다. 이미 먹어서 괜찮다고 사양하자 내일 저녁에 다시 오겠단다. 솔직히 애를 써서 찾아준 것이 아니기에 하영은 괜찮다고 다시 사양했다. 하지만 진서는 그녀가 책을 들고 있던 것 자체가 고맙다며,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들고 갔을지도 모른다며, 그렇다면 자신은 책이 없어 곤란했을 거라는 말을 하며 꼭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한다. 에라 그래, 까짓 거 봄이니까, 뭐 어때. 다른 벤치에 앉아 서로의 손을 쪼물락 거리는 연인들이 보이자 하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저녁, 그녀는 진서와 저녁을 먹었다.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시원한 매력적인 외모다. 아마 따르는 여자들이 꽤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기는 계란 노른자가 올라간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좋아한다면서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요리에도 관심이 있나 보다. 화분에 바질과 루꼴라를 키우는데 특히 바질은 물을 줄 때마다 맛있는 향이 난다고 웃는다. 말도 제법 재미있게 잘한다.



"잠깐 저기 앉아 마시고 가요."

식사를 마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올라가는데 그가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내민다. 정문에서 헤어졌는데 어느새 커피를 사 들고 하영을 따라왔나 보다. 그는 벌써 벤치 앞에 가 있다. 하영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날도 다른 벤치에는 커플들이 꽁냥 대고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진서는 자기 커피잔을 벤치에 내려놓고 하영이 앉을자리에 떨어진 꽃잎을 치워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자기를 챙겨주는 진서의 다정한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하영이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 휘릭 바람이 일었다. 순간 벤치 위에 가득하던 꽃송이들이 흔들리면서 꽃잎이 와르르 쏟아졌다. 꽃잎 몇 개가 진서의 머리 위에서 하늘거리다가 바람이 살짝 방향을 트니 하영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갑자기 진서가 벌떡 일어나 하영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그러더니 허리를 쑥 굽혀 얼굴을 하영의 코앞까지 들이민다. 하영이 놀라서 쳐다보는데 그는 왼손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컵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컵 윗부분을 살짝 가린다.



"커피잔 안에 꽃잎이 들어갈까 봐..."

놀라서 쳐다보는 하을 보며 쑥스럽게 웃는다. 두 손과 두 손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컵을 같이 잡고 있다. 종이컵 속 커피가 떨린다. 하영은 갑자기 흩날리는 꽃잎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꽃잎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 순간 진서의 손등에 꽃잎이 하나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 대요."

‘어라, 이 좌식 선수인 것 같다. 이런 순간에 연애 꽤나 해본 남자의 작업 멘트를 날리다니.’ 실망으로 하연의 설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바람도 잦아들면서 몽환적으로 공중을 흐르던 꽃잎들도 땅바닥에 뒹군다. 진서는 그녀의 실망하는 마음도 모른 채 손등 위에 놓인 꽃잎에 입김을 후 불었다. 꽃잎이 다시 날아올랐다.   


   

하영은 저도 모르게 왼손을 들어 얼른 날아가는 꽃잎을 잡았다. 아, 당황하는 사이 진서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꽃잎, 꽃잎, 꽃잎들이 바람을 따라 일렁인다. 출렁인다. 솟구친다. 휘돈다. 마치 솜사탕 기계 속에서 연분홍의 실타래가 휘돌아 나오듯 꽃잎들이 컵을 같이 잡고 서 있는 하영과 진서를 맴돈다. 바람이 달다.    


사진 출처 드라마 / 그겨울,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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