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와 립스틱
우먼타임스 2022.05.05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며칠 전부터 야외에서 마스크 쓰기는 해제되었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마스크를 쓴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부스스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야구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나섰다. 걷다 보니 5월 초인데도 초여름 날씨라 마스크를 벗어 손목에 걸었다.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기면 얼른 다시 쓰려고 굳이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도 마스크를 준비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에는, 그러니까 코로나가 극심해져서 모든 국민이 집 외의 모든 공간에서 항상 마스크를 끼기 전에는 외출할 때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었다. 오늘처럼 집 근처에 갑자기 나갈 때 세수는 귀찮아도 립스틱은 살짝 발랐다. 입술에 붉은색이 더해지니 생기가 도는 얼굴로 변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엄마에게 배운 것이다.
우리 엄마 장 여사는 화장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눈두덩을 칠하는 화장을 한 엄마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외출할 때는 꼭 립스틱을 발랐다. 집에 붙은 가게로 일을 하러 나갈 때도 그랬다. 입술을 살짝 내밀어 립스틱을 바르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마주 붙여 ‘음파음파’ 소리를 내듯이 몇 번 움직여주면 엄마의 화장은 끝났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엄마 얼굴이 훨씬 환하게 변했다.
엄마는 신기한 립스틱을 주로 사용했다. 바를 때는 투명한데 바르고 나면 진한 분홍으로 변했다. 입술에 붙은 색이 잘 지워지지 않아서 편하다고 하셨다. 조금만 발라도 온종일 색이 유지가 되니 돈이 많이 들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다. 하나를 사면 솔을 이용해서 좁은 원통형의 립스틱 용기의 바닥까지 훑어서 사용하셨다.
결혼 후 어느 날 친정에 가보니 엄마의 낡은 반닫이 위에 백화점에서나 살 수 있는 유명 상표의 립스틱이 있었다. 동생이 쓰다가 유행이 지났다고 버리려는 것을 아까워서 엄마가 가져왔단다. 엄마도 그 상표를 알고 계셨다. 그 외에도 다른 고급 화장품 상표를 몇 개 말씀하시며 엄마가 좋아했던 상표도 알려주셨다. 프랑스에서 만드는 아주 유명한 제품이었다. 엄마가 젊어서 쓰던 그런 립스틱을 쓰지 않은 것은 값이 비싸서였다.
팔순이 지나서도 엄마는 외출 준비로 제일 먼저 “내 구찌베니가 어디 있더라” 하시며 립스틱을 찾으셨다. 몇 년 전 크게 아파서 중환자실에 보름을 입원한 후에도 그러셨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마스크를 쓴 다음부터는 외출 의식인 ‘구찌베니 바르기’를 안 하신다. 엄마는 심장에 지병이 있고 연세가 많아서 부작용이 걱정되어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엄마는 남은 삶 동안 밖에 나갈 때는 꼭 마스크를 쓰셔야 한다. 아마도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다시 입술연지를 바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엄마처럼 화장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출근할 때는 선명한 붉은색의 립스틱을 주로 발랐었다. 노인 병원의 하루는 어제나 오늘이나 별다른 일이 없이 지나간다. 환자들은 노안도 심하고 눈도 뻑뻑하고 보이는 것도 흐릿하다. 나는 이왕이면 잠에서 깨어난 노인 환자들에게 그날 처음 보는 사람인 내 얼굴을 선명하게 보이고 싶었다. 할머니들은 쥐 잡아먹은 듯한 빠알간 입술의 50대 ‘어린 새댁’이 나타나면 이쁘다고 반가워하셨다. “아이고 고와라!” 하시며 손뼉을 치시는 분도 계셨다.
병원에서는 당분간 마스크를 계속 써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병원이라는 공간에서는 앞으로 계속 마스크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 다섯 시에 동백 꽃잎처럼 붉은색으로 입술을 칠하고 새벽 인사를 할 수 있는 날이 과연 다시 올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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