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서대문-독립문역, 한국근대역사길<1편>

1. 한국근대역사길(1): 7km/3시간 소요

by Hiker 나한영

한국근대역사길 개요

정동-서대문-독립문역을 축으로 하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 무대였던 현장을 걷는 '한국근대역사길'을 소개한다. 한국 근대역사의 시작이었던 정동을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의 악랄한 침탈의 아픔이 여전히 새겨져 있는 서대문 일대를 지나, 자주 대한의 열망과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서린 독립문역까지 걷는다.


<걷기 전 길 이해하기>

구미 열강의 전진기지, 정동


정동은 근대 서울의 시작이며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서양 열강들은 산업혁명으로 원료 공급, 상품 시장 개척, 자본 투자를 위해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열강의 진출은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에까지 미쳐 청나라일본을 압박해 문호를 개방시켰다. 대체로 통상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실리를 추구했으나 몇몇 나라와 지역에 대해서는 자치 능력이 없다는 구실로 식민 침탈 야욕을 드러냈다. 한국에 있어 열강의 진출 중심지는 각국의 공사관이 몰려든 정동이었다.


왜 정동이 중심이 됐나?

원래 외국 공사관이 자리를 틀만한 가장 유력한 장소는 세종로 네거리와 경복궁 사이의, 경복궁에서 볼 때 세종로(육조거리) 왼쪽부터 안국역에 이르는 견지동, 재동 지역이었다. 실제로 처음엔 이곳에 통상과 외교를 담당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1882)과 관세 징수의 근대적 행정기관인 해관본부(1883), 관립 영어학교 동문학(1883), 근대적 우편통신기관 우정총국(1884) 등 통상과 관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기관들이 들어섰다.

그런데 임오군란(1882)에 이어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은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정권을 둘러싼 변란이나 민중의 반외세 움직임에 있어서 도심 중앙은 혼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방어와 탈출이 용이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서양인들이 집단 거주지로 주목한 곳이 정동이었다. 성벽이 바로 옆이어서 자연 보호막이 되고, 서대문과 가까워 경인선을 통한 제물포와 한강과의 연결성이 좋고, 궁궐과 정부 시설과의 인접성도 좋고, 언덕이 있는 지형으로 시내를 내려다보거나 국민들이 잘 볼 수 있어 홍보 효과도 좋은 점 등 많은 지형적 이점이 있었다.

결국 정동에 미국,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공사관이 자리를 틀었다. 공사관이 들어서자 교회도 자국 공사관 주변으로 들어섰다. 미국 공사관 북쪽으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 지역이 형성돼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활동하며 고아원, 학교, 정동 여학당 등이 들어섰다. 공사관 남쪽은 미국 감리회 선교지역으로 스크랜튼에 의해 병원(1885)이 생겨나고, 이어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스크랜튼의 이화학당 등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 영국 공사관 옆엔 영국 성공회 성당을 비롯한 선교 지역이 형성됐다.

나중에 새문안 교회, 정동 여학당, 스크랜튼 병원 등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확장 이전할 만큼 정동은 서구 문물이 유입되고 변화를 만드는 중심이 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왕궁(경운궁, 지금의 덕수궁)마저 정동으로 옮겨왔고, 해관본부마저 이전해와 정동은 외교, 통상,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한국 근대 역사의 중심이자 구미 열강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현재의 정동과 역사 유적들




열강의 합작품 침탈과 병탄

우리는 한 가지, 정동이 형성된 이유만이 아니라 이때의 아픈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일본은 강제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1876)을 체결한 이후 동해 원산(1880), 서해 인천(1883), 남해 부산을 개항시키고 거주와 통상 확대 등 조선 침략 야욕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중국은 이 같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자국에 눈독을 들이는 유럽 국가들을 한국에 끌어들였다. 이로써 구미 공사관들이 정동에 밀집하게 되었고, 한국은 침략 야욕을 키우는 세계 각국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조선 정부는 날로 거세지는 외침과 내란 속에서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을 갈아타며 갈피를 못 잡으며 대외 의존성을 높여갔다. 갑오왜란(1894),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경운궁 이차(1897)로 이어지는 허수아비 조선을 놔두고 열강들끼리 벌인 숨 가쁜 침탈의 역사는 급기야 1904년 러일전쟁으로 세력 판도가 일본으로 재편되고 만다. 이로써 정동에 밀집한 구미 공관들은 역할을 잃었다.

한 나라의 왕이 왕궁에 있지 못하고 자국 주재의 공사관에 몸을 피하고(아관파천),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1년 이상을 외국공관에서 지낸다는 건 누가 봐도 정상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국모가 일개 외국 공사에게 시해당하고(을미사변), 왕이 신변 안전 때문에 정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외국 공관이 밀집한 정동의 경운궁으로 이차할 수밖에 없던 현실은 이미 조선이 운을 다했음을 보여 준다.

정한론을 키워 오던 일본은 임오군란(1892)과 동학농민운동(1894)을 기화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텐진조약(1885)에도 불구하고 일방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해 국왕을 포로로 유폐한 갑오왜란(1894)으로 조선은 사실상 이때부터 멸망한 셈이다.

일찍이 순조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된 독재적 세도 정치와 극에 달한 부패로 조선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나라는 개화파, 척화파, 수구파 등으로 사분오열됐고 조정은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을 중심한 권력 다툼 탓에 끊임없이 일본, 중국, 러시아를 번갈아 끌어들여 나라보다 권력 유지에 혈안 되므로 스스로 망국을 앞당겼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백성들이 보다 못해 동학농민운동으로 국운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제국주의의 칼날은 국권을 잃은 왕궁 앞에 이미 당도해 있었다.

우리나라와 가장 먼저 수호통상조약을 한 나라는 미국(1882)이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는 ‘조선과 미국은 제3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서로 문제 해결을 알선하며 돕는다’고 명시했다. 한국은 이 말 그대로 미국을 외세 침략을 막아줄 바람막이로 여기고 미국에 매달렸다.

그러나 제국주의 미국 역시 조선이 무력화되가는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목도했고, 한국이란 나라에 정을 떼었다. 일본이 러일전쟁 후 조선 내정에 완벽한 독점권을 쥐게 된 후 드디어 1905년 7월 29일, 도쿄에서 가쓰라 일본 총리 겸 외상과 태프트 미국 육군성 장관이 밀약을 한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점령국 교환 합의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당시 미국의 한국을 보는 시각은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언론인 G. 케난에게 보낸 편지(1905) 등 서한과 자료 곳곳에 남아 있다.


“한국이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한국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다. 한국인은 자치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 일본은 입헌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활기에 넘치는 문명 국민이다.”


일본은 밀약이 오간 뒤 100여 일이 지나 정동 중명전에서 을사늑약(1905)을 강제 체결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미국은 늑약 체결 후 가장 먼저 외교공관을 철수시켰다. 밀약의 당사자인 태프트가 미국의 27대 대통령, 가쓰라가 일본 총리로 재임하던 1910년 조선은 결국 일본에 병탄되고 말았다.

한일합방 이후 루스벨트는 조미조약이 지켜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말한다.


“한국은 일본의 것이다. 한국의 독립은 확실히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엄숙히 약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스스로가 그 조약을 이행하기에는 무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다른 나라가 자기를 희생해서, 한국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한국을 위해서 감히 행동할 것이라고는 아무리 해도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조약은 한국이 훌륭히 자치할 수 있다고 하는 잘못된 전제에 입각한 것이었다.”


강자는 합리화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그 피해는 약자의 국민이 온몸으로 당해야 한다. 국가 간 약속이나 조약은 필요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 없을 때는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조약이다.

오늘날이라고 더하면 더했지 다를 수 없다. 자국 이익과 세계 신 질서의 패권 경쟁에 돌입한 최강대국들 사이에 한국이 끼어 있다. 이 틈에 북한은 연신 탄도미사일 실험 등 핵전력을 고도화하며 한반도 정세 불안을 높이고 있다. 날로 상시화되는 지구촌 재난 시대와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최격변기 속에서 세계는 자국 이기주의와 각자도생의 무한 생존경쟁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그때처럼 세기적 혼돈과 변혁의 시대에 놓여 있는 오늘날에 있어 정동은 더욱 시사점이 크다. 세계 열강의 집합지였던 정동은 140년 전의 현장을 고스란히 품고 지금도 직접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굳아픔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배움이 크기 때문이다. 정동을 출발점으로 하는 한국근대역사길 코스를 짜서 떠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