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단지 먹을거리만이 아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힐링을 위한 여가 생활을 하고, 옳다고 믿는 가치와 신념을 위해 활동하고 살아간다. 그런 태도가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므로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들이 지켜지지 못하고 깨질 때가 있다. 다양한 원인과 이유로 원치 않게 벽에 부딪히고 때로는 삶이 스러지는 감내할 수 없는 아픔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아픔은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를 지키는 밑거름이 되고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가 된다. 우리가 그것을 희생으로 기억하는 이유이다.
극복은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치유는 곧 회복을 의미한다. '땡땡거리 가는 길'은 삶이 겪는 아픔에 대한 극복과 치유의 길이다. 시대 순으로 희생의 길을 걷고 마지막으로 옛 순수의 거리인 땡땡거리에서 이 시대를 사는 자들의 극복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시작하는 곳: 이태원역 1번 출구
◇마치는 곳: 용산역
◇경유지: 이태원참사골목-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전쟁기념관-신계역사공원-새남터-땡땡거리
◇거리/소요시간: 7km/2시간
1. 젊은 꿈 삼킨 이태원참사골목
159명의 젊은 꿈이 희생된 곳
시작은 이태원역 1번 출구이다. 출구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골목(해밀톤호텔 옆 골목)은 159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된 곳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도저히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났다. 많은 사회 안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고 책임지지도 않는 모습 속에서 다시 한번 우리 삶의 보호막과 국가사회의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골목 앞에 가만히 서 본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긴 터널을 견뎌내고 거리에 나섰다가 희생된 활기차고 꿈 많던 젊은이들의 명복을 빌고 다시는 이 땅에 그 같은 애꿎은 희생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2.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는 곳,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으로 가는 길
이어서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으로 향한다. 이곳은 이태원부군당이지만 '역사공원'이라는데 방점이 있다.
대로에서 이태원로 23길로 들어선다. 이 작은 골목은 이태원 골목의 단면을 보여준다. 작은 골목과 교차하는 뒷골목 이태원로 27가길 또한 이태원으로 특징짓는 먹자골목을 대표하는 곳이다.
쭉 직진해서 계단을 올라 이태원로 15길을 걷다 보면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바로 오른쪽 맞은편에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태원로 23길을 직진한 후 계단을 통과해 언덕에 오른다.
이태원의 대표 조망 명소
역사공원에 올라서면 훤한 조망이 먼저 들어온다. 북쪽으로 남산이 바라보이고 북서쪽으로 인왕산, 서쪽으로는 전쟁기념관이, 남쪽으로는 여의도 빌딩들까지 한눈에 담긴다. 가까이는 이태원과 용산미군기지, 해방촌 일대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어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은 조망 명소로 꼽힌다.
일몰 땐 멋진 노을을 볼 수 있고, 야간엔 남산의 N서울타워와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역사공원에선 북쪽 남산과 남쪽 여의도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는 언덕
부군당府君堂이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만 불리던 신당神堂의 명칭이다. 특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집산지에 많았다. 부군당은 현재 서울 지역에 10곳 정도가 전해지는데, 이태원부군당은 서울·경기지역의 대표적인 부군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는 장소라는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싶다.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이곳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추모비가 있는 역사공원 앞길은'유관순길'명예도로로 지정됐다. 유관순 열사는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에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추서 된 삼일운동의 상징인 분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졌을까.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 추모비
3. 이태원에 담긴 한의 역사
일제강점기 이태원 일대의 변화
원래 이태원 지대는 남산과 이어진 산이었다. 이곳 남산 자락의 한남동과 보광동을 아우르는 이태원 일대는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무덤이 큰 산을 이룬 공동묘지였다.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는 일본의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자리이다. 당시 경성이 일제의 조선 수탈의 본거지로 확장을 거듭하던 때 이태원이 조선군사령부 옆에 한강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일제는 이태원을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가로 탈바꿈시켰다.
1936년 일제는 공동묘지 위에 개발을 강행했다. 일제가 공동묘지를 망우리로 이장한다는 공고를 내긴 했지만 기간 내에 오지 않는 사람은 무연고 무덤으로 처리해 화장했다. 또 수많은 무덤이 이장 과정 없이 그대로 뭉개졌다. 2020년 삼성가 재벌 3세가 이태원 적산가옥 터에 대저택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관도 없는 유골 61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을 정도다.
1930년대 용산구 이태원 일대 공동 묘지(서울역사박물관)
묘소는 흔적조차 없어도 추모는 영원할 것
이때 안장된 지 1년밖에 안 된 유관순 열사의 유골도 유실됐다. 무연고 무덤을 화장해서 망우리 공원에 합장묘를 세웠다고 하므로 그 속에 유관순 열사가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일본군에 체포됐고, 고문을 당하다 1920년 9월 28일 순국한다. 이후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모교인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10월 14일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해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치른 뒤 당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치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래서 열사가 묻혔던 이태원 공동묘지가 내려다보이는언덕 위의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 열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이곳에서 열사의 순국일인 매년 9월 28일 추모제를 지내며 정신을 이어 가고 있다.
침탈과 선도는 한 축 선상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미군 부대 자리는 과거 몽골군, 왜군, 청군, 일본군이 차례로 거쳐온 수 세기 간 외국 군의 주둔지로 이방인의 땅이자 역사의 영욕의 현장이었다. 외국 군의 주둔지 옆 이태원은 자연히 외국인 거주지와 상가지가 되었다. 국력 향상과 함께 지금의 이태원은 작은 지구촌을 방불하며 한국의 다문화를 상징하는 세계적 명소가 되어 있다.
미군 부대와 다문화 거리는 따지고 보면 한 축 선상에 있다. 쇄국으로 맞서 싸웠던 것과 개화로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 동전의 양면 같은 선택의 기로였던 것처럼, 한국인이 외세 침략의 희생양이 되는 것과 한류를 이끄는 세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미래에도 침략과 선도, 어느 쪽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이 같은 엄중한 역사를 품은 이태원 일대를 아우르며 내려다보는 언덕에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다시는 억울한 침탈의 역사와 애꿎은 희생이 없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4. 서민주택 골목 속으로
이태원의 원류 서민주택 골목
이 뜻깊고 멋진 역사공원에서 훤해진 가슴을 안고 언덕을 다시내려선다. 유관순길을 걷다가 서민의 주거지 골목으로 곧장 들어선다. 낯선 이곳이야말로 이태원의 지금을 잉태한 오랜 서민주택 골목이다. 번화한 길 안쪽에 소방차가 못 들어가는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옛 주택들의 모습이 짙은 향수를 일으킨다.
이태원은 남서 지역과 동북 지역의 차이가 크다. 남서는 재래시장, 서민주택, 다문화가정의 영역이고, 동북은 고급주택과 명품가게들이 즐비한 이른바 한남동 고급 문화권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태원 남서쪽의 서민 지역은 개방과 역동의 상징이 되어 있다. 이태원 1, 2동, 이태원거리와 해방촌거리, 경리단길을 축으로 나이 많은 지역 주민, 젊은 문화 예술인, 76개국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색적인 공간이다. 마치 몽마르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좁은 주택가 골목 사이를 헤치고 내려서면 바로 녹사평역 1번 출구로 건너가는 녹사평육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