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 2022. 12. 11.
무진정 아래 괴산재
날이 시원하고 햇빛이 환하게 쪼이는 정이월 열하루 이른 겨울날 아침에 무진정을 방문했다. 무진정 서편 아래로 괴산재가 한 담장 안에 같이 있는데 들어서는 문이 훤히 열려 손님을 맞고 있다.
괴산재는 무진정의 주인 조삼(1473~1544)을 기리는 종중의 재실이자 교육 전당으로 1670년 괴산마을 서편 산기슭에 창건되었다. 1899년 더 높은 자리에 새로 지었다가 산 중턱에 있어 이용이 불편해 현재의 자리에 다시 새로 짓고 1992년 괴산재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식을 한 건물이 지금의 괴산재 건물이다.
우주를 담은 무진정을 마주하다
괴산재를 지나 바위 언덕을 오르니 무진정이 소박하면서 깔끔한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인데 전후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 1칸에 방을 배치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이다. 담양의 면앙정과도 같은 모양으로 남부 지방의 영호남 정자 문화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들문을 열면 방과 마루의 구분이 따로 없이 개방감과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고 있다.
갔을 때도 들문을 열어두어 무진정의 멋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가운데 방 한 칸을 핵으로 마루를 빙 둘러친 모습은 정자라기보다 한 칸의 작은 우주이다. 사방 4면이 열려 기둥만 남고 모든 것이 무애한 상태로 자연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은 무진정마저 그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인 신재 주세붕(1495~1554)이 무진정에 대해 "온갖 경치가 모인 조물주의 무진장"이라고 극찬한 이유가 이해된다.
삼도의 자줏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通三島之紫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 挹十洲之煙光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淸風自來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明月先到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不出跬步
온갖 경치가 모두 모여 萬像咸集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信乎造物者之無盡藏也
-<무진정기無盡亭記> 주세붕
반걸음조차도 움직일 필요 없이 무애한 모습의 무진정으로 노을과 바람과 달이 먼저 이르고 온갖 경치가 모두 모여드니 다함이 없이 넓고 많은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 아니고 무엇일까.
조삼이 직접 지은 정자
'대한민국 구석구석', '답사여행의 길잡이', '두산백과' 등 인터넷엔 무진정에 대한 정보가 '조삼의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심지어 무진정 중앙의 방이 온돌이라는 소개도 있어 무진정을 소개한다는 정보가 오히려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무진정은 조삼이 후진 양성과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라도 직접 지은 정자이다.
조삼이 교유했던 주세붕이 조삼이 사망하기 전인 1542년(중종 37)에 '무진정기'(주세붕의 문집 <무릉잡고>에 실림)를 쓴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무진정기>엔 귀거래사歸去來辭한 조삼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정자의 경치가 다함이 없고 선생의 즐거움이 또한 다함이 없다. 정자의 이름과 선생의 이름이 모두 다함이 없음을 환히 알겠네"라고 하여 조삼이 벼슬에서 물러나 정자를 지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무진정無盡亭’이라고 쓴 편액도 주세붕의 글씨로 추정된다.
후손들이 원래 있던 무진정을 1547년(명종 2) 다시 중수했고,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한 것으로 1976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생육신 조려의 손자
무진정의 주인 조삼은 다섯 지방의 목사와 춘추관 편수관을 지낸 조선 전기 문신으로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 조려(1420~1489)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를 닮아 올곧은 성격으로 연산군이 즉위하자 문과 응시를 포기했다가 중종이 즉위한 뒤에야 성균관에 입학했다. 생원일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독서를 좋아해 아침, 점심상이 들고 나가는 것을 모른 채 글에만 전념했던 일화가 <함주지>에 전한다.
무진정 앞 연못 이수정
무진정 바로 앞엔 이수정이란 연못이 있다. 연못도 무진정으로 같이 말하지만 연못만 따로 말할 땐 이수정이라고 부른다. 무진정의 대문인 동정문動靜門을 나서면 바로 연결된다.
무진정과 연못가 주변에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과 느티나무, 배롱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수형을 가진 노거수가 많아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펼친다. 이수정 연못 가운데엔 육모지붕 누각인 영송루迎送樓가 있는데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운치 있는 홍예교라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조선 후기인 1889년 4월에 함안 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은 한 달 후에 무진정에 처음 올랐다. 그에게 무진정은 가뭄 속 단비 같은 장소였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사람도 좋은 그런 자리였다. 그는 저서 <함안총쇄록>에서 못가에 있는 정자 무진정에 대해 말한다.
"부자쌍절각 아래에 못이 있고, 못 가에 조그만 정자가 날아갈 듯 서 있는데 무진정(無盡亭)이라 한다. 집의(執義) 벼슬을 지낸 조삼(趙參) 선생이 창건했는데 초목이 깊이 우거졌고 대숲이 맑고 기이하였으며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는 연못에 대해서도, 처음엔 못이 둥글고 널찍했는데 후손들이 부강해지자 지역 양반들이 흙을 져다 부어 못을 메우자 이상하게도 그 뒤로 조 씨들이 많이 쇠퇴했다고 적었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처럼 후손들이 파서 만든 인공 연못이 아니라 원래는 강물이 흘러와 자연스럽게 조성된 연못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한때 흙을 메워 축소되기까지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함안 낙화놀이가 열리는 곳
이수정은 매년 4월 초파일에 열리는 전통 불꽃놀이인 낙화놀이(줄불놀이) 장소로도 유명하다. 참나무 숯으로 가루를 만들어 한지나 광목으로 길게 봉처럼 돌돌 말아 싼 낙화봉을 연못 위에 숱하게 매달아 불을 붙여 불빛이 떨어지고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즐기는 놀이이다. 함안 낙화돌이는 조선 선조 때 함안군수로 부임한 정구(1543∼1620)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괴산재에서 공부하던 학동들도 격년제로 무진정에서 낙화놀이를 했다.
오횡묵은 낙화놀이를 시로 읊었다.
붉은빛은 꽃이 피어 봄이 머무는 듯하고
밝음은 별 무더기 같아 밤은 돌아오지 않네
-<함안총쇄록> 오횡묵
밤을 잊은듯 불꽃놀이로 사방이 밝고 주변이 봄처럼 화사한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참 휴식 선사하는 무진정
무진정의 주변으로 지금은 찻길에 둘러싸여 답답할 것 같지만 무진정에 있으면 그런 막연한 느낌은 사라진다. 무진정은 앞의 연못과 함께 지금도 사계를 즐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주세붕의 기문에 의하면 무진정이 처음 이곳에 지어질 때도 함안천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무진정이 세워진 절벽을 돌아 북쪽으로 들어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풍경은 주변으로 나무와 산, 들판이 뻗어있고 조그만 집도 없다고 설명한다.
자연이 가득하고 들판이 뻗어있던 주변 경관은 많이 바뀌었어도 무진정은 옛 풍류를 대변하며 지금도 뭇사람들에게 참 휴식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