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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May 12. 2023

버드나무 사랑 이야기

조선 최고의 순애보 홍랑과 고죽

   요즘 강가에 무성한 버드나무를 보면 사랑하는 연인들의 이별 장면이 생각난다.

   사극 드라마를 보면 남녀가 이별할 때 나룻가의 버드나무 밑이 공식처럼 등장한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멀리 떠나는 님에게 정표로 삼기 위해 꺾어 주던 것이 버들가지다. 옛 시절엔 이별할 때도 낭만이 가득한 듯 보인다.

   그러나 당사자들에겐 낭만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별은 견디기 힘든 아픈 순간일 뿐이다. 그나마 버들가지가 유일한 위로가 되었기에 버드나무 아래에서 이별을 했던 것이다. 버드나무가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이별의 아픔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버드나무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해 본다.




"잊지 말고 기억해 주세요"


   예로부터 버드나무는 남녀의 사랑과 정분의 상징이었다. 연인들은 물 오른 수양버들 강가에 모여들어 사랑을 나누었다.


수양버들 파릇파릇 강물은 넘실넘실

강위에선 그 임의 노랫소리 들리네

-<죽지사> 당나라 때 유우석 시인



   이별하는 장소도 버드나무 아래다. 연인들은 헤어지기 전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정표로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다. 버들가지를 꺾는 '절양류' 풍습은 한나라의 장안 사람들이 벗을 전송할 때 파교라는 다리에 나와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이별을 아쉬워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버들을 꺾는다’는 말이 송별을 의미하게 됐다.

   정표로 받은 버드나무 가지를 가져와 땅에 꽂아 두면 뿌리를 내려 자라게 되어 두고두고 임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만한 정표도 없었다. 버드나무 ''는 머물 ''와 같은 발음으로 '가지 말고 머물러 달라'는 애원의 의미도 담긴다. 그러니 이별 장소는 정표를 줄 수 있는 버드나무 아래가 제격이었다.

동성엔 봄풀이 푸르다지

남포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
-<증별> 당나라 저사종 시인

   이별하는 사람마다 가지를 꺾어 버드나무에 가지가 남아나지 않는다.


서동(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조성된 부여 궁남지 서동공원에 늘어진 버들가지



생사를 초월한 사랑


   버들가지가 뜻하는 끊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홍랑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이 ·송익필 등과 함께 조선시대 팔문장이자 삼당시인으로 시명이 높았던 고죽 최경창(1539 ~ 1583)이 함경도 북평사로 국방의 요지인 경성에 부임했을 때였다. 홍원 관아의 관기였던 홍랑이 그의 수발을 맡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홍랑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녀를 알아본 한 의원의 도움으로 천부적인 시재를 가꾸며 절세가인으로 자랐다. 기예, 문장, 인물과 성정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데 없이 출중한 그녀와 문장과 학문이 높던 고죽은 서로의 인물을 알아보았고 불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2년여의 꿈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어느 날 고죽이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귀임하게 된다.

   관기의 신분으로 넘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는 홍랑이었지만 여기서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 홍랑은 고죽을 따라 몇 날며칠을 태산준령을 넘어 멀리 쌍성까지 갔다. 이젠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관에 묶인 신분으로 더 이상은 경계를 넘어갈 수 없게 된 홍랑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삼키고 돌아선 홍랑이 홀로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은 저물고 비가 내리고 있는데 앞에 산버들이 피어나고 있다. 홍랑은 버들가지를 꺾어 사무치는 정을 시조로 읊은 서찰과 함께 고죽에게 보낸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홍랑이 직접 쓴 <묏버들> 시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시로,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시조 <묏버들>이다.
   마음이 간절하면 만나게 되는 것인가. 그 후 둘은 한양에서 만나게 된다. 고죽이 아프다는 소식에 홍랑은 법까지 어기고 관기의 금기인 경계를 넘어 한양에 올라와 최경창을 간호하며 살았다.

   그러나 당시 인순왕후의 국상 중에 첩을 삼았다는 이유로 고죽은 파직되고 '양계의 금'을 어긴 홍랑은 경성으로 추방된다. 고죽은 홍랑과 이별하며 <송별> 시를 써준다.

옥 같은 뺨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니
새벽에 휘파람새도 이별을 울어 주네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오려나
함관령에서 부르던 옛 노래 부르지도 말아라
지금까지도 구름비에 청산이 어둡나니


죽어서 흙이 되어 만나다


   고죽은 나중에 종 3품의 종성부사로 임명되지만 동인들의 끝없는 모함으로 강등돼 귀경하던 중 경성 객관에서 45살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고죽 사후에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고죽의 묘소가 있는 파주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이도 임의 무덤을 떠나지 않던 홍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죽의 유작을 챙겨서 사라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자진함으로써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어서 홍랑은 고죽의 무덤 아래에 묻혔다. 지고지순으로 사랑했던 임의 옆에 죽은 후에야 영원히 있을 수 있게 됐다. 홍랑의 순애보에 감동한 고죽의 문중이 자발적으로 모셨기에 가능했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노비의 묘를 사대부의 묘소에 반려로서 인정하고 모셨다는 것은 기적처럼 희귀한 일이다. 둘 사이에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 이루어진 것은 사랑의 초월성과 순결성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신분도, 시대도, 그 어떤 것도 사랑 앞에 장애는 없었다.


400년이 지나서


   그 후 400년이 흐른 2000년, 신도시 개발에 밀려 고죽의 묘를 파주 최북단 적성면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홍랑의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 묻혔던 '묏버들' 시의 원본과 고죽의 육필 원고들이 다량 발견되었다. 전쟁통 속에서 홍랑이 고죽의 유작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시와 원고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둘의 사랑 이야기도 영원히 묻혔을지 모른다. 숨 막히는 사랑과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고죽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 <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졌다.


   둘은 뜨겁게 사랑했다.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같았다. 둘이 같이 쓴 <무제> 시가 있다.


임은 서울 계시고 첩은 양주에 살아

날마다 임 그리워 취루에 올라보면

방초는 짙어지고 버들은 쇠어가는데

비낀 석양에 빈 눈길 강물만 바라보네


   앞 두 행(정)은 홍랑이 쓰고, 이를 받아 뒤 두 행(경)은 고죽이 썼다. 살아서 함께 하지 못했던 세월들이 죽어서 흙이 되어 만났고 두 사람이 쓴 시는 묘의 돌에 새겨져 하나가 되어 있다. 고죽과 홍랑의 묘소 앞에는 그들이 생사를 초월한 반려였음을 밝히는 시비가 자랑스럽게 길손을 맞고 있다.


고죽 문중이 고죽 묘 밑에 묻어 준 홍랑의 묘(좌), 동계사에 있는 고죽 최경창의 초상화(우)
반포 서래섬 강가 버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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