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정에서 세심정까지 자전거길을 가다

완주기행 2. 만경강 자전거길

by Hiker 나한영

Ⅰ. 호남평야의 젖줄 만경강


그림 같은 정경 만경강의 저녁

해가 서녘으로 기울면 만경강의 시간이 찾아온다. 대부분 습지를 이루고 흘러가는 강물의 윤슬이 청초하게 빛나고 강가 수풀들이 노을빛에 물드는 자연의 하모니가 펼쳐진다. 그 위로 천연기념물 고니와 청둥오리가 날아가는 장면은 한 폭의 그림이다.


국내 최대의 하천 습지

만경강은 완주 북동부의 험준산지에서 발원한다. 만경강(원등산713m 발원) 원류는 대아저수지에서 큰 물을 이룬 뒤 고산천(운장산1,112m 발원)과 소양천(만덕산763m 발원)을 만나는 회포대교까지 오면 경사가 완만한 호남평야지대를 흐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갑작스럽게 유속이 떨어지면서 하천이 운반해 온 자갈과 모래들이 퇴적돼 하중도河中島를 만들고 습지생태계가 조성된다. 하천이 흐르는 유로에 형성된 하도 습지로 살아있는 건강한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이 대표적 구역이 신천습지이다. 환경부는 2.4㎞ 길이의 국내 최대의 하천 습지인 신천습지를 습지보전 등급 상上으로 분류했다.

신천습지엔 특히 많은 하중도가 형성돼 다양한 식생의 원천이 되고 있다. 갈대와 부들, 연꽃을 비롯한 67종의 식물과 개개비, 물닭, 노랑부리저어새 등 멸종위기종 7종과 천연기념물 4종 등 총 802 분류군이 서식하고 있는 최상의 생태자원이다.


하중도와 생태가 발달한 신천습지의 모습


직선상 하도로 바뀌다

또 만경강은 산지를 빼면 하구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에서 서로 정방향으로 흐른다.

원래 만경강은 전형적인 곡류하천으로 드넓은 충적평야 위를 이리저리 휘돌아가며 흘렀다. 마치 아프리카의 대평원을 이리저리 곡류하는 강의 모습으로 호남평야를 이리저리 적시며 흘렀다.

반면 만경강이 감조하천이다 보니 농사에 불리한 점도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삼례 지역의 만경강에서 물을 끌어와 호남평야를 적시는 20여 km의 독주항 수로(1770년대)를 만들었던 이유도 드넓은 평야를 적시는 절대적인 필요 외에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만경강 제방이 축조돼 지금의 직선상 하도로 바뀌었고 보다 상류인 어우보로부터 물을 취수하는 장장 80여 km의 대간선수로(1940년대)를 만들었다. 이 지역이 대단한 곡창지대이다 보니 순전히 쌀 수탈을 위한 공사였다.


만경강 직강화 공사 이전(1911년)과 이후(2000년)의 변화


새만금을 살리는 모태

만경강은 직선 하도를 흐르는 강으로 모습이 달라지고 유로의 전체 폭은 줄었지만 지금도 넓은 하도 습지를 이루고 서향으로 변함없이 흐르며 여러 관개수로를 통해 호남평야를 적시고 새만금호의 모태가 되고 있다.

사실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만드는 원대한 계획으로 새만금호가 만들어졌고 이후 갯벌 생태계 파괴, 수산자원의 고갈, 해양오염의 증가 등 여러 환경 문제가 불거졌지만 그럼에도 아직 하구 나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은 만경강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태 습지를 통해 하천 물이 자연 정화되며 끊임없이 곡창지대를 적시며 새만금의 황해로 흘러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새만금 방조제의 부작용이 많으므로 새만금의 활용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자연친화적 환경 개선 대책을 위해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리는 산을 자르고 강과 바다를 막으며 자연에다 인공 구조물을 메스처럼 항상 들이대지만 자연은 한없이 인간을 품고 생명의 원리를 지켜낸다. 우리는 자연에 한없이 감사해야 한다.


생태 습지로 하천 물이 자연 정화되며 흐른다.


일제가 새로 만든 이름?

만경강의 조선시대 이름은 사수강泗水江이었다. 사수강은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과 공자의 고향을 흐르던 강 이름인데 이곳 전주(조선시대엔 지금의 완주와 전주가 다 같은 전주군)가 유방과 공자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로 사수강이라 불렀다.

그러던 것이 만경강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일제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제가 창씨개명 전에 창지개명의 악행을 전국에 걸쳐 했고, 쌀 수탈을 위해 만경강에 공을 많이 들인 것도 맞지만 다행히도 이름은 우리 고유의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만경강의 이름은 멀리 통일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백제의 두내산현이라는 이름이 만경현으로 바뀌었다. 만경이란 ‘백만이랑’이라는 뜻으로 넓은 들을 말한다. 즉 만경강이란 넓은 들 가운데로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조선 시대엔 사수강 외에 다른 이름도 쓰였다. <동국여지승람>은 만경강 하류를 신창진이라고 하고 상류는 안천과 남천이라고 했다. 따라서 사수강 이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름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땅의 활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지금의 만경강 이름을 미안해하거나 아쉬운 마음 없이 잘 사용하면 된다.


만경강이 왜 아름다울까

아무튼 만경강이 서류하여 흐르므로 지는 해가 만경강을 최대한 길게 비춰 하천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어낸다. 만경강이 저녁에 특히 아름다운 이유이다.

이때쯤 자전거를 타고 만경강 자전거 길을 간다면 하루 중 가장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굴곡이나 경사도 거의 없어 편안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오늘은 강가의 완산 8경 비비정에서 세심정까지 만경강길을 대표하는 약 20km의 만경강 자전거길을 따라가 본다.


만경강 신천습지가 노을빛에 물들어 한폭의 수채화 같이 빛난다. 만경강 옆으로 자전거길이 달리고 있다



Ⅱ. 만경강 자전거길


1. 삼례와 한내


완산 8경 비비낙안의 황홀경

6월 3일 오후 6시 서녘 해가 강가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 비비정飛飛亭에 도착했다. 비비정은 만경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례읍 후정리 만경강변의 언덕 호산湖山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곳이 완산 8경 중 하나인 ‘비비낙안飛飛落雁’의 장소다. 완산8경이란 완주와 전주가 백제 때부터 같은 완산주로 오랜 이 지역의 8경을 일컫는다. 춘향전에도 완산8경이 나온다. 어사가 된 이몽룡이 완산팔경을 모두 구경한 다음 남원을 향해 내려간 이야기가 나온다.

비비낙안은 석양빛이 부서지며 반짝이는 한내에 고깃배가 오르내리고 백사장의 갈대숲에는 기러기 떼가 사뿐히 내려앉는 수묵화를 닮은 정경을 비비정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를 말한다. 비비낙안의 멋을 알려면 이곳의 옛 모습을 알 필요가 있다.


비비낙안의 장소 비비정


옛 교통 중심지 삼례와 한내

비비정이 있는 삼례 지역은 수상교통의 중심지이자 조선의 9대로 중 2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6로인 통영대로(삼례-전주-남원-진주-통영)와 7로인 삼남대로가 만나는 곳으로 삼례도찰방(동부교회 자리로 추정)이 상주하며 전주, 임실, 익산, 정읍, 부안, 김제 등에 걸쳐 있는 12개 역을 관할했을 정도로 전라북도의 중심으로 번영했다.

또한 옛날엔 이곳 삼례 지역을 지나는 만경강을 별도로 한내寒川로 불렀다. 현재 삼례 지역의 비비정 소개 안내판에는 이곳의 만경강물이 유난히 차가워서 이름 지어졌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기실은 깊은 산속에서 흘러나온 소양천과 고산천, 전주천이 합류하는 지점이어서 '큰 내' 라는 뜻의 이두 표기로 생각된다.


2. 비비정과 비비낙안


한내 백사장의 기러기떼 바라보던 비비낙안

옛날엔 이곳이 지금처럼 수풀이 우거지지 않고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졌던 곳이다. 50여 년 전까지도 사람들은 한내의 눈부신 모래빛 강변에서 모래찜을 하러 이곳을 일부러 찾아왔다고 한다.

가을엔 백사장에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내려앉아 있었다. 군산과 부안에서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가 강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주변으로는 드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평야 사이로 흐르는 만경강과 유유히 떠오는 소금배, 강변의 은빛 백사장과 기러기떼까지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냈다.

지금은 직강화 공사로 지형이 바뀌고 만경강 수위가 크게 낮아지고 돛단배와 모래사장도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비비정은 노을 전망으로 유명해 해 질 녘이 되면 낙조가 장관이고 가을에 기러기떼가 날아들면 여전히 비비낙안 절승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을지는 저녁 비비정 주변 만경강의 풍경(자료 사진)


비비정 건립과 이름의 연유

비비정은 조선 선조 때 무인 최영길(첨절제사)이 처음 건립(1573년)했다. 그 후 영조 때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1752년)했고, 1998년에 완주군이 지금처럼 복원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건립자 최영길의 손자 최양의 청탁을 받고 <비비정기飛飛亭記>라는 기문을 써주었다.

송시열은 기문에서 조업으로 무관을 지낸 최영길과 아들 최완성, 손자 최양을 언급하고, 최양이 살림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칭찬하며 "옛날에 신의와 용맹으로 알려진 장비와 충과 효로 알려진 악비의 충절을 본뜬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다 할지라도 뜻은 큰 것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이곳은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비비낙안’이라 하였고 완산 8경 중의 하나이다."라며 비비정 이름의 연유를 얘기하고 비비정에 오르는 사람들이 두 장군처럼 올바르게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담았다.


만경강변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자리한 비비정과 밑을 흐르는 한내


비비정이 두 개인 이유

그런데 비비낙안의 최적의 조망지인 삼례 비비정과 동명인 정자가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에도 존재한다. 이유가 궁금하다.

비비정을 창건한 최영길의 후손인 최낙기 우석대 교수에 의하면 삼례에서 살던 전주최씨 일가가 임실군 성수면 계월촌으로 옮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송시열 비비정 편액과 비비정기를 토대로 1899년 비비정을 이건(1930년 중수)했다. 조선후기 문신인 황경원은 저서 강한집에서 최 씨 일가가 옮겨가기 전 삼례 토호들이 비비정을 철거하고 묘지로 조성했는데 이 사실을 안 전라관찰사 서명구가 크게 분노해 묘지를 없애고 현재 자리에 중건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에 따라 원래의 비비정 자리에 있던 우암이 쓴 비비정 편액과 비비정기 원판은 현재 임실로 옮겨갔고, 지금 삼례 비비정엔 서예가 강암 송성용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삼례 비비정엔 강암 송성용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3. 비비정예술열차


수탈의 역사의 증거 위에 놓인 비비정예술열차

비비정에 서면 만경강과 주변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 보인다. 비비정의 서쪽 옆엔 지는 햇살을 머금은 비비정예술열차가 운치를 더하고 있다. 비비정예술열차는 구 만경강 철교 위에 세워진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비비정에서 바라본 비비정예술열차


일제는 1912년 호남지방의 농산물을 수탈 반출하기 위해 익산~전주 간 협괴철도를 처음 개통했다가 이 철도의 농산물 반출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자 1928년 일반철도로 광궤화했다. 이때 새로 준공한 만경강 철교는 당시 한강철교 다음으로 전국에서 2번째로 긴 교량이었다. 지금은 폐 철교가 되어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호남평야의 곡물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증거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완주군은 이 구 만경강 철교 위에 4량의 새마을호 폐 열차를 구입해 비비정예술열차를 개장했다. 레스토랑과 음악 공연장, 특산품 판매점, 편의점과 갤러리, 카페 등으로 구성돼 많은 이들이 식사나 차와 함께 만경강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찾고 있다.

수탈의 역사의 증거 위에 비비정예술열차가 설치된 것은 역사의 극복과 치유를 의미한다. 보존하고 또 이를 활용하므로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 현재를 사는 우리의 추억과 삶의 의미를 더하는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구 만경강 철로 위에 설치된 비비정예술열차


4. 강변 자전거길로 세심정까지


자전거 타기 좋은 길

강이 넓게 흐르는 것처럼 보여도 옆으로 습지와 퇴적 지대가 훨씬 더 넓다. 양 둑방 사이의 강폭이 600여 m에 이른다.

이 강변에 제방 바로 밑으로 자전거길이 잘 놓여 있다. 이 길은 걷기에도 물론 좋지만 자전거를 타고 만경강의 청정 공기를 가르는 맛이 최고다.

오늘은 비비정 아래 강변으로 내려가 자전거길을 따라 고산면의 세심정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만경강 신철교와 전주천 합수머리

출발하자마자 비비정 동쪽 옆으로 콘크리트 구조의 철교가 만경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바로 전라선이 지나는 만경강 철교이다. 2011년 전라선 복선화사업을 진행하며 일반열차와 고속열차가 함께 이용하는 철교로 건설됐는데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가 인상적이다.

만경강철교와 삼례교 밑을 통과하노라면 전주천의 새 물줄기가 합류하는 합수머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주천은 전주시에서 동남쪽으로 26km 정도 떨어진 완주와 임실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의 슬치瑟峙 고개에서 발원해 전주 시내의 정중앙을 관통하며 30km를 흐르는 만경강의 제1지류이다.


콘크리트 구조의 만경강 신철교의 모습


5. 생태자원의 보고 신천습지


노을 지는 신천습지의 아름다움

바로 앞 하리교부터는 '만경강의 허파' 신천습지가 시작된다. 인간의 손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섬들이 강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다양한 식생이 깃들었다. 뱀장어, 돌고기, 참종개, 버들붕어, 금개구리 등 다양한 어류와 양서류가 서식하고 먹이가 풍부한 만큼 사시사철 이들을 먹이로 하는 새들이 즐겨 찾는다. 멸종 위기 야생 생물인 황새, 노랑부리저어새, 삵 등도 서식하고, 식물종도 풍부해 억새와 갈대뿐 아니라 여뀌, 창포, 갈퀴덩, 자귀나무 등 열거가 힘들고, 조금 더 있으면 노랑어리연꽃, 가시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무리 지어 핀다.

사람은 발을 디딜 만한 길만 있어도 갈 수 있다. 수풀 속 소로를 따라 강가로 가본다. 하도 생태습지의 자연정화 덕분인지 강물이 꽤 맑다. 해가 지면서 강변 풀밭과 꽃들이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산한다. 나도 아름다운 자연의 일원이 되어 본다.

더 올라가면 회포대교 부근에 소양천 합류지점이 나온다. 하리교부터 회포대교까지를 신천습지로 부른다.


'만경강의 허파' 로 불리우는 신천습지. 강 저편에 전주 시내가 보인다.


6. 동포귀범의 향수 속으로


완산 8경 동포귀범의 향수 속으로

회포대교 아래를 통과해 자전거길을 따라 4km 정도를 더 올라가면 봉동교가 나온다. 봉동교는 옛날에 선창부두와 마그네다리가 있던 곳이다. ‘마그네’는 ‘막은 내’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봉동교 위치에 ‘막은 내’, 즉 ‘보’가 있어 수량이 풍부하여 물놀이하며 물고기도 잡던 여름철 명소였다.

이 봉동천에 고기잡이 돛단배가 돌아오고 하구에서 거슬러 올라온 소금배 젓거리배 등의 행렬이 산수화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이 풍경이 바로 완산 8경의 하나인 동포귀범東浦歸帆이다. '동포'는 이곳 봉동읍 장기리의 마을 이름이다.


주요 교통로로 이용됐던 만경강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바다와 강의 물길이 막혀 버렸지만 50년 전만 해도 서해안 밀물 때면 이곳까지 작은 돛단배들이 소금과 생선을 싣고 들어왔다가 썰물 때 지역 특산물을 싣고 빠져나갔다.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다 보니 예부터 봉동의 생강마을이 전국구로 번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 만이 아니라 전주부가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만경강이 교통로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밀물 때 이곳 완주 봉동과 전주 모래내까지 강물을 밀어내는 감조하천이었기에 가능했다.


7. 조선 최초의 생강 산지 봉동을 가다


조선 최초의 생강 생산지 봉동

완주가 생강 특산품으로 유명한 것은 바로 이곳의 봉동 생강마을 때문이다. 생강마을은 7대째 250년 간 생강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실은 <태종실록>에도 흔하지 않은 전주부의 봉상(봉동) 생강이 언급(1414년)될 만큼 봉동은 600년이 넘는 조선 최초의 생강 생산지였다. 그 이후에도 <세종실록지리지>, <동의보감>, <택리지>에서 꾸준히 언급되고 있고, 구비 전승으로도 봉동읍 봉실산 아래 은하리 일대 지석묘 아래에서 향초(생강) ‘시앙’이 자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한국 최초 생강조합인 봉상산업조합이 결성(1930년)되었다.


아름다운 둑방길을 달리다

봉동교를 지나 둑길로 올라선다. 이곳부터 차가 다니지 않는 둑길이 용봉교 앞의 상장기공원까지 이어진다.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양 옆으로 늘어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둑방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설렘이 가득한 기분을 또 어디서 맛볼 수 있으랴.



홍수 범람 막기 위해 당산제 지내는 곳

봉동읍 상장기공원은 해마다 홍수의 범람을 막기 위해 당산제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엔 15개의 비석이 줄지어 있는데 기념비 몇 개를 제외하면 모두 불망비이다. 불망비란 지방 수령이 임직을 마치고 떠날 때나 공훈이 큰 지방 유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다. 관찰사들과 어사의 불망비도 보이고 군수, 면장의 불망비도 보인다.

공원 앞엔 1930년대 경성시대의 살롱을 재현한 '경성살롱' 카페가 지금 봐도 화려하게 서 있다.


8. 산지 초입에 건설된 대간선수로 취수구


완주 동북부 산지로 접어들다

용봉교부터 찻길인 고산천길 옆으로 난 자전거길을 따라 찻길과 나란히 달린다. 그렇게 1km 남짓 이어지다 고산천길은 율소리도 들어가는 찻길과 둑방길로 나뉜다. 당연히 둑방길로 이어간다.

이곳부터 산들이 가까이 강을 에워싼다. 완주의 동북부 산지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길은 아직 편하다. 옆으론 만경강 물줄기가 흘러내려가고 아직 넓은 하도 습지가 이어진다.


대간선수로가 시작되는 곳 어우보

천호천을 지나면 다시 차가 다니지 않는 좁은 둑방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2km쯤 달리면 어우삼거리 못 미쳐서 어우보에 이른다. 바로 어우취수구가 설치된 곳이다.

어우취수구로부터 80km에 이르는 인공 관개수로인 대간선수로(*Ⅰ에서 소개)가 시작된다. 대간선수로는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와 만경강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야말로 대수로이다.


어우보취수구에서 대간선수로가 시작된다.


9. 마음을 씻는 세심정에서 마치다


오늘의 종착지 세심정

산지로 접어든 만큼 만경강이 곡류한다. 굽이굽이 돌아 만경강수변생태공원을 지나고 다시 한 구비 돌면 오성교를 지난 곳에 오늘의 종착지 세심정이 있다.

고산천과 만경강이 합수된 물이 넓은 세심보에 가득 담겨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이 강물을 바라보는 작은 언덕 위에 대나무숲에 잠긴 세심정이 나타난다.

세심정은 조선조 문신 만죽 서익(1542~1587)이 1585년 의주 목사를 사임(탄핵받은 이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고 전한다.)한 후 고산의 산수에 매료돼 지은 정자이다. 항상 마음을 청정하게 씻는다는 의미에서 세심정이라 이름 짓고 정자 주변으로는 만 그루의 대나무를 심고 자신의 호를 만죽으로 불렀다.


세심보가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세심정


고산향교와 함께 역사탐방지대 이뤄

현재의 정자는 옛 선인들의 숨결과 고산천의 아름다운 정취를 살리고자 2005년 복원한 것이다. 처음 건립했던 때를 떠올려도 좋을 만큼 세심정 주변에는 대나무밭이 빼곡하다.


세심정 주변 강 둔덕으로 대나무밭이 빼곡하다


세심정 아래쪽엔 강가를 따라 너른 공터가 소담하다. 장소가 아늑하고 분위기가 있어 사람들이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세심정이 있는 언덕 뒤쪽엔 고산향교가 자리한다. 조선 초기인 1397년 창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1년(선조 34)에 새로 건립했다. 고산향교는 지금도 봄가을로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세심정 주변 모습(상) 과 조선초 창건된 고산향교(하)


생태적, 역사적 의의와 함께 했던 만경강길을 마무리하다

만경강은 생명을 품고 흐르며 나라를 먹여 살리던 호남평야를 적시던 강으로 그 역할로 치면 어느 큰 강에 못지않다. 내륙 깊이 교통로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 전주부를 호남의 중심으로 발전시킨 원천이 됐다.

만경강을 따라 생태적, 역사적 의의와 함께 청정 자연을 맘껏 만끽했던 여행을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오늘 만경강 자전거길은 해 질 녘의 아름답고도 청정한 자연을 황홀할 만큼 즐겁게 힐링하며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생명의 보물창고 같은 생태 환경이 잘 보전된 것에 감사한다. 이를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세심정의 고산면 시내를 빠져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