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ker 한영 Aug 21. 2024

걷기의 발견

걷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나를 만나는 것이다

(동양의 석학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에 심취한 적이 있는데, 걷기를 사랑하는 저는 '걷기의 발견'이란 글을 써봅니다^^)


   우리는 걷는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걸을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걸으며 우리의 신체를 끊임없이 움직이므로 모든 장기가 활성화되고 건강과 면역력이 높아지고 뇌가 발달하고 정신건강에 좋기 때문에 걷기가 좋다고 한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걷기를 안하는 사람에게 걷기를 독려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과학적 결과물들과 걷기의 효과를 거론하는 것은 걷기를 단지 수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형이하학적인, 다분히 속물스런 얘기에 속한다. 물론 걷기가 주는 과학적 효능을 말하자면 가히 만병통치약과 같다. 내가 그것을 체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것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나는 형이상학적인 부분, 즉 걷기가 주는 힐링과 삶의 질에 대해 말하고 싶다.  


도시 인생은 행복할까?

   우리는 항상 목적을 강요받아왔다. 만약 "넌 인생 목표가 없는 놈이야"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 '실패자'가 되는 등식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바삐 사는 모습으로 비쳐야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비전이나 목표를 가져야 인정받을 것처럼, 우린 그런 척하며 그 속에 숨어 살았다. 1등과 성공은 우리가 전 인생을 통해 추구해야 할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도시로 도시로 모여왔다. 아니 도시가 우리에게로 왔다. 계속되는 도시화가 그것이고, 우리나라는 인구의 95%가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지금은 도시 태생이 더 많다. 이제 우리는 도시가 아니면 살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보는 도로와 그에 연결된 건물들, 도시 시설물들은 모두 일을 위한 공간들이다. 더 넓은 도로, 더 빠른 도로는 일터로, 거래처로 더 빨리 가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일개미처럼 산다. 일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 환경 속에서 목적을 위해 바삐 사는 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전국 어딜 가도 우리가 보는 건 똑같은 차도와 차도에 연결된 똑같은 도시 시설물들이다. 건물의 모양이 다르다고, 휴게 공간이 넓다고 마치 새로운 발견인양 하지만 똑같은 도시공간일 뿐이다. 신기한 건 우리가 여기에 적응돼 그것이 우리 삶의 공간의 전부인 줄 알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모든 것이 있는 줄 알고 살고 있다. 일을 위해 도시에 적응된 우리의 눈은 언제부터인가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차도로 연결된 도시엔 실상 모든 게 감춰져 있었다. 만약 도시로 인해 다른 것을 볼 수 없고 즐길 수 없게 되었다면 그것은 질곡이다.

   자연이 막혀버린 도시의 세상에선 계절이 오고 가는 모습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자연을 따라 우리가 변해간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게 정지된 양 헛된 꿈을 꾸며 살고 있다.

   건강도 잃어버렸다. 병원을 쉴 새 없이 가고 약을 달고 사는 이유는 도시생활의 습관들 속에서 자연의 건강 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잃고 변형됐다.

   감성도 잃어버렸다. 아니 감상에 젖을 만한 기회도 환경도 주어질 수 없었다.

   경험도 잃었다. 매일 같은 환경 속에 하루하루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는 날들을 보내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웃을 수 없는 경직된 인간, 정지된 인간이 되어버렸다.

   사람도 없었다. 사람을 만나도 일을 위해 만나거나 조건이 맞아야 만났다. 그런 만남은 우리의 고립감을 더할 뿐이다.

   우리가 행복을 위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분위기 좋은 카페에 차를 타고 가서 잠시 앉았다 오는 일이었다. 힐링을 위한다고 공연장에 도 내가 주체가 아닌 관람자로 앉아 있는 이상이 될 수 없고, 운동을 한다 해도 갇힌 공간인 Gym에 가서 할 뿐이었다.

   우리는 티브이 속에서 연예인들이 노는 것을 보며 웃는다. 영화, 야구경기, 연극공연 등 모두 나는 없는 대상을 보고 사는 것에 익숙하다. 나를 투영한 대리만족의 삶이 확대되는 것은 상업화된 세상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다. 돈이라는 상응하는 대가 지불 없인 그것조차 즐길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홀로 도시 속에 갇힌 참으로 불행한 도시 인생이었다.  

   무엇보다 큰 불행은 피상적인 것 속에 안주하며 나를 잃어버린 나는 정작 항상 스트레스와 불안장애, 고독감에 삐걱거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나를 먼저 찾아야 한다.


나를 만나는 즐거움 

   나는 매일 새로운 발견을 한다. 하늘을 보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햇빛에 반짝이는 무수한 나뭇잎들을 보고, 졸졸거리며 소리 내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고, 무수히 밟히는 나뭇잎과 겨드랑이를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땅거미 지는 조망터에 올라 하늘과 땅이 빚어내는 오묘한 찰나를 느낀다.

   항상 같은 모습, 같은 환경이 아니라 시시각각이 전하는 무수히 다른 환경 속에 내가 있다.

   나는 마냥 순수하게 웃을 수 있다. 내가 웃으면 거래가 성사되는 어떤 목적을 가진 웃음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즐거워 웃을 수 있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 속 고립감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함께 걷고 순수하게 웃고 나눈다. 이익이라는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에 도시사회가 만든 신분이나 어떤 조건, 목적이 없이 본래의 인격으로,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순수하게 만난다.  

   나는 걷기를 통해 삶의 본질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도시적 삶을 통해 잃어버린 본연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길 위에서 만큼은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직접 주인공이 된다. 그곳에 나의 존재가 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만나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실존이다.  

   걸으면 비로소 보인다. 매일 지나다니던 길조차 무엇이 있는 줄 모르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에겐 목적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최첨단 도시의 최고의 문명사회를 산다는 것이 실제는 돈버는 기계처럼 무미건조해져 우리의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그동안 너무 모르고 살았다. 사직단, 백제토성을 매일 지나다녀도 그곳에 사직단이 있는지,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목적지만 있는 찻길에서 잃어버렸던 무수히 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걸으면서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길이 다양한 것만큼 길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로는 강이, 숲이, 늪이, 다리가, 시냇물이, 억새가, 이름 없는 들꽃이, 바위가, 돌부리가, 갈대가, 구름이, 바람이, 하늘이, 물안개가, 걸으면서 보는 기와장이, 장독대가, 담벼락에 걸린 표주박이, 대문에 걸린 장식품이, 담 넘어 뻗은 가지가, 가지 위에 달린 단감이, 보도블록의 모양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가지각색의 우리 삶의 환경이 걸으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비 오는 어느 날 해방촌을 걷다가 들어간 카페는 오아시스였다. 차를 타고 가서 들어갔다면 느낄 수 없는 소중함은 임팩트와 감정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걸으면 길가의 풀 한 포기, 상점 창가에 걸린 인형까지 모든 것이 살아난다.

   내 몸을 움직여 걸으며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내가 시시각각 새로운 환경속의 일부가 되어 보고 느끼는 것이 많을수록 나는 많은 경험을 한다. 정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새로움들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준다.

   그 속에서 나의 뇌를 깨우고 나는 매일 새로운 느낌과 색다른 감상에 젖을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동안 갖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이다. 걸으면서 나는 존재하고 그 속에서 느끼므로, 걷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체이며 나의 발견이다.  


맺는말

   우리가 걷기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도시 인생에서 단지 일을 위해 적응된 나, 피동적이 된 나, 사회가 만들고 규정한 직책과 조건에 둘러싸인 나, 단지 소유를 위해 닦이고 훈련된 수단으로 전락한 내가 아닌 본연의 나를 만나기 위해 걷는다.

   목적과 성취가 진리인 것처럼 세뇌당해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절벽을 향해 질주해 온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걷는다.

   짧은 인생을 원치 않는 일로 채우며 사는 삶에서 내가 즐거운 것을 하면서 사는 인생으로 바꾸기 위해 걷는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걷는다.

   내 오감에 허락된 감성을 깨우고 비로소 햇볕을 받은 식물처럼 자라나게 하기 위해 걷는다. 한걸음 한걸음 장소마다 시각마다 전해오는 무수한 감상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 걷는다.

   목적의 굴레를 벗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멈추면 비로소 볼 수 있다. 걸으면 내 본성을 깨울 수 있다. That's it,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데 그 이상 멀 더 바랄까!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

(제목 배경 사진: 알프레드 시슬레- 망트의 길)

매거진의 이전글 걷기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