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같으면 못 느끼는 감정인데, 나뭇가지를 만지면 부서질 만큼 모든 것이 동태가 되는 곳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두 명을 보며, 냉동이 될 만큼 아무리 추워도(내가 가져간 네모난 생수가 땡땡 얼어 팽창해 동그란 모양이 됐다.) 피가 도는 한 살아 있을 수 있는 생명의 위대함과 신비를 새삼 느꼈다. 산은 반짝 단풍 행락처럼 놀러 가는 곳이 아니다. 화악산 종주산행을 잊지 않기 위해 후기를 써본다.
1. 생명활동이 멈춘 곳
부르르르.. 탁!
눈 속에 차 시동을 끄는 찰나 생명은 멈췄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잘 기다려다오. 차에서 내려 장비를 갖춘 내 모습을 보고 혁이가 의아해한다. 지난주 가야산이나 2주 전 계방산 때도 귀마개 하나로 버텼었는데, 안 하던 모자에 넥워머에 귀마개까지 이중 삼중으로 머리를 감쌌으니ㅎ 장갑도 2중이고 장갑 속엔 손난로도 넣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오늘은 20210109 지상에서도 영하 16도인 강추위이므로 1천 미터 이상 고지는 10도 이상 차이가 날 것을 예상해 나름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손바닥으로 몸 가리기였다.) 석룡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계곡, 사람발자국은 안 보이는 눈길, 동물들만 이 길을 지나간 듯, 여러 동물들 발자국이 보인다. 어찌 보면 동물들 발자국을 따라 산을 올라간 것 같다. 대비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추울 줄은 몰랐다. 계곡을 지나 능선을 탔을 때부터 북풍이 산을 밀어내듯 몰아친다. 이젠 동물 발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내 완전무장이 무색하다. 얼굴이 굳어 눈이 감기지 않는다.
왜에애애앵...
귀가 따가울 만큼 큰 바람소리를 들으며 눈 언덕에 바람이 파도 같은 물결을 만든 눈산을 푹푹 미끄러지듯 온 힘을 다해 오른다.
2. 석룡산 정상
혁의 제안대로 바람이 부는 북쪽 능선을 비켜서 남쪽 아래쪽 바위 옆에 앉았다. 혁이가 커피와 달콤한 과자를 준다. 너무 맛있다.
"과자는 이런 때 먹으라고 있는 거야"
"하하 저도 산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어서 가져와요"
바람을 피해 마시는 커피 한잔의 여유, 아! 기분 최고다. (내 생강차는 찬물이 될 줄도 모르고 아껴두었다.)
석룡산 300m 전 이름 모를 봉우리 위에 서니 까마득히 멀리 우리가 갈, 웬 시설물이 잔뜩 들어선 화악산 정상이 보인다. 통신시설이나 천문대 같은 시설이 아닌 군시설이다. 사실 화악산은 금지된 산이다. 오지 말라고 막지는 않지만 등산로가 없는 산이다. 비밀의 산인 셈이다.
드디어 석룡산 정상(1147m)이다. 전망은 좋지 않지만 잘 깎은 정상석이 멋지다. 이 높은 산 위에 이 큰 돌을 누가 잘 깎아서 가져다 세웠는지 갑자기 궁금할 정도다. 뒤 쪽엔 옛날에 세웠던 작은 정상석도 서 있다.
3. "등산로 없음" 팻말
화악산 방향으로 산을 내려와 쉬밀고개에 섰다. 4거리여야 할 곳이 능선 쪽으로는 길이 없는 3거리이다. 팻말은 양 옆으로만 내려가도록 돼 있다. 능선을 타는 직진 방향은 "등산로 없음"이란 팻말이 선명하다.
"우리 직진해야 돼"
"입산금지 경고문이 없는데요 머 가시죠"
혁의 대답은 명쾌하다. 역시 케미가 맞다ㅎ
길은 없다. 푹푹 눈을 밟는 대로 20~30cm씩 꺼진다. 오르막에선 아이젠을 신었어도 미끄러지므로 발에 온 힘을 다 줘야 한다. 평소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한참 온 것 같은데 보니 아직 5km 남짓밖에 못 왔다. 오늘 걸을 거리가 총 17.6km이니 온 것의 2배 이상 더 걸어야 한다.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4. 천혜의 경관
길 없는 길중간에 얼음 김밥을 먹고오르막끝에 드디어 삼일봉(1,280m)이다. 등산로가 없으니 정상석은 물론 표지판도 없다. 나머지 2면은 깎아지른 경사면이고 한쪽은 덤불이다. 그래도 뚫고 가야 한다. 계속되는 오르막과 바위 절벽을 뚫는다. 북벽을 오르고 참호를 지난다. 군 통신선이 보인다.
어느새 발밑이 훤하다. 마지막 아슬아슬한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는데, 군 기지에서 헬기가 떴다.
두두두두두...
우리 쪽으로 온다. 사방 설원인 낭떠러지의 눈 덮인 바위 절벽을 오르는 2인과 헬기의 조우, 미션 임파서블의 장면이 떠오른다.
헬기는 우리 위 상공을 한 바퀴 돌아 저 멀리 가버린다. 필시 우릴 보았을 것이다. 부대를 향해 길 없는 곳을 오르는 두 명이 적인지 등산객인지 판단했을 것이다. 혁이는 대위 출신이고 군용 헬리를 타본 적도 있어 안다. 여기선 부대가 너무 잘 보인다. 그러나 부대 방향으론 사진도 안 찍었다. 우릴 계속 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국토종주 끝에 사진을 모두 삭제당한 경험이 생각난다.
추운 날씨를 말해주는 지평선 하얀 띠와 땀이 얼음이 된 모자 앞 하얀 띠
5. 정상 같았던 북봉
사실 이곳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군사기지이다. 화악산 정상(1,468m)은 그 높이 상 멀리 사방이 발아래로 뚫려 있고 위치 상 서해안과 동해안의 중앙이다. 그래서 북의 징후를 한반도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관찰한다. 레이더 기지, 탐지 기지이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인 부대에게 우리 둘은 개미 2마리에 불과하다. 군생활 때 아무리 파도가 쳐도 레이더 기지에서 수면 위 1m만 돌출된 것이 있어도 감지하던 때가 생각난다. 알고도 감시만 하며 놔두는 것이다.
몇 번의 오르막을 더 올라 드디어 북봉(1,469m)이다. 화악산 정상(부대)이 바로 코앞이다. 어느 산도 이 북봉만큼 시원한 전망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 사방이 뚫려 있다. 그러나 아무도 못 와 보는 봉우리이다. 간혹 오는 사람들(등산 마니아들)이 있긴 있다. 이렇게 추운날 올라온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마냥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석룡산부터종주 산행 루트에길은 안보이고, 20~30cm씩 푹푹 꺼지는 눈길에,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에 지치고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벌써 3시 40분이 넘어가고 있다.
북봉(1,469m)
6. 화악산을 통과하다
북봉을 내려서서 군부대가 있는 화악산 정상 앞에 서니 군사지역 경고 팻말이 가로막고 있다. 철책이 높이 쳐져 있고 그 앞으로 철망도 있다. 부대 양쪽을 봐도 아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은 덤불에 꽉 막혀 도저히 갈 수가 없다. 우린 부대 왼쪽을 택했다. 철책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 세워져 있다. 철책이 설치된 한 뼘 정도의 남은 곳을 밟고 간다. 삐끗하면 저 벼랑 밑으로 떨어진다. 눈에 덮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숭숭 뚫린 바위 지대를 아슬아슬 지난다. 생과 사를 오간다.
실은 지난주 가야산 때 바위 능선길에서 내 스틱이 부러지는 바람에 집에 있던 망가진 스틱을 가져온 게 패착이었다. 한쪽 스파이크 부분이 잘라져 힘을 못 받는데 너무 힘을 줘서 삐끗 미끄러지며 내가 절벽 쪽으로 1자로 넘어가는 순간 얼어 있던 성한 스틱이 내 몸에 부딪혀 두 동강으로 부스러지고 덕분에 나는 바로 앞에 바위에 떨어졌다. 구사일생이다. 천만다행으로 앞에 돌출된 바위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살았지만 이젠 망가진 스틱 하나로 앞으로 남은 먼 길을 가야 한다.
부대는 꽤 컸다. 한참을 그렇게 곡예 걷기를 하고 있다. 갈수록 점점 상황은 좋아졌지만 그래도 깎아지른 경사면을 아슬아슬 가야 한다. 삐끗하면 눈과 함께 굴러 떨어져야 한다. 이곳은 나무도 없고 거칠 것도 없다. 가다 보니 콘크리트로 경사면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나온다. 구조물을 감싸고 있는 철망을 잡고 한발 한발 전진해 아슬아슬 구조물을 돌아서는 순간, 몇길 위에 길이 있다. 화악산 뒤쪽에 있는 부대 정문 앞에 온 것이다. 아까 오면서
"저 부대 물자는 헬기로 나르나. 왜 임도길이라도 안보이지"
하고 찾았던 그 길이다. 사실 부대나 임도길은 보안상 지도에 보이진 않는다. 직접 와보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부대가 차지한 화악산을 정상 10m 아래 경사면으로 돌아서 임도길로 올라섰다.
7. 초소와 함께 있는 중봉
이젠 중봉으로 가야 한다. 중봉까지도 부대가 차지해 능선으론 갈 수가 없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 중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만났다.
드디어 중봉 정상(1,447m)이다. 정상엔 전망대가 설치돼 있고 전망대 옆으론 부대 경계초소가 있다. 초병이 누가 중봉에 오는지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붙어있다.
북봉 가는 길이 막혀 있고 화악산 정상에 부대가 있으니 이 중봉이 화악산의 억지 정상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부대가 붙어 있어 전망은 사방이 트인 지나온 북봉만 못하다.
8. 지도를 볼 수 없다
오후 5시,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내 핸드폰은 아직 배터리가 있음에도 추위로 다운돼 지도를 볼 수가 없다. 다행히 혁이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일반지도라 길이 안 보인다. 애기봉을 향해 가다가 차를 세워 둔 조무락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는 길에 해가 지고 있다. 혁이가
"뒤돌아 보세요"
한다. 돌아보니 사진을 찍어준다. 뒤로 해가 지고 있는 오늘 마지막 사진이다. 추운 대신 날이 맑고 미세먼지가 없어지는 해의 붉은색이 너무 곱다. 장갑을 벗으면 금세 손이 아린 추위지만 혁은 장갑을 벗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기 위해 아예 검지 손가락 끝부분을 잘라서 왔다. 난 2중 장갑도 추워서 장갑 속에 넣은 손난로만 잡고 있으므로 아마 혁이도 손가락이 얼어붙을 만큼 추울 것이다. 암튼 참을성이 대단하다.
해는 지고 아직 30분가량 길이 보이는 시간이 남아 있는 사이에 재빨리 최대한 많이 내려가야 한다. 가느라 가고 갔지만 그러나 올 것은 왔다. 금세 캄캄해졌다.
9. 길을 잘 못 들다
내려가다 잠시 멈추어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원래 가야 할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어두운 길을 빨리 내려오다 보니 팻말을 못 봤는지 팻말이 없었는지 잘 못 온건 확실하다. 그러나 이제와 다시 올라갈 순 없다. 그리고 여기도 분명 길은 길이다. 다시 램블러로 보니 길이 있긴 있다. 빨리 하산해야 하므로 그냥 계속 내려가기로 했다.
렌턴에 의지해중봉에서 약 5.5km를내려오니 산속에 불빛이 보인다. 규모가 큰 펜션이다. 포장길이다. 길가에 앉아 스패츠와 아이젠을 벗고 있는데, 펜션에서 나온 차가 지나간다. 재빨리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차 좀 태워주실 수 있으세요" "어디 가시는데요" 여기서 차 있는 곳까지 10km 쯤 돼서 차마 말을 못 하고 있는데, 혁이가 "큰길까지만 좀 태워주세요" 한다. 옆에 앉아있던 부인이 말한다.
"뒤에 짐이 많아서 안 되겠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여자는 냉철한 거 같다.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상한 사람 태우면 큰일 날 수 있으니 만에 하나를 방지하는 게 낳을 것이다.
10. 식당 주인집 아저씨
거기서 600m쯤 가니 큰길에서 조금 더 가 편의점이 있고 그 앞에 무슨 집인지 반짝반짝 간판이 빛난다.
"와 저기 식당인가 봐요"
"저녁도 먹고 차 좀 태워달라고 하자"
저녁 8시, 아직 9시 전이니 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 반 의심반 해서 가까이 가보니 슈퍼마켓이다. 슈퍼에 들어가니 훈훈한 기운에 살 것 같다. 그러나 슈퍼 안엔 아무도 없다. 일단 앞에 편의점이라도 들어가려고 하는데 슈퍼 옆에 뒤쪽으로 식당이 하나 보인다. "저기 식당이 있어요"
반가워서 가니 문이 닫혀 있다. 창문으로 안에 사람이 보인다. 문을 두드렸다. 아주머니가 나오신다. "지금 식사 안돼요" 아주머니는 문을 닫고 가버리고 희망이 턱 막히는 순간, 마지막 끈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럼 차라도 태워달라고 얘기해 보자" 하고 다시 문을 두들겼다. 혁이가 "저희 차를 저쪽에 세워놔서 그러는데 차 있는 데까지 차 좀 태워다 줄 수 있으세요" 대답이 없다. 문을 닫고 들어가 대신 안쪽으로 머라 머라 얘기하는 것 같다. 저쪽에 보니 아저씨가 옷을 입고 계신다.
아저씨가 나오신다.
"길을 잘못 내려오셨나봐요"
"네, 밤에 길이 잘 안 보여서요"
"이쪽은 길이 험할 텐데요"
아저씨가 화악산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다. 왕년에 산악구조 소방대원으로 일했단다. 아니면 걸어가야 했을 길을 덕분에 8km를 편안하게 차로 이동해 조무락 입구에서 내렸다. 여기부턴 비포장길이고 눈이 덮여 있어 더 가자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11. 꿀맛 저녁
적당히 사례를 하고 다시 차가 있는 산골짜기로 걸어 올라간다.
"이 추운 날씨에 눈 속에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있었는데, 혹시 시동 안 걸리면 어쩌지?"
"그러게요. 아저씨 전화번호라도 받아둘걸 그랬나봐요"
약 1.1km를 걸어 올라가니 아침에 세워둔 고대로 차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손잡이를 잡으니 불이 켜지고 문이 철컥 열린다. 살아있다. 이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니 평소처럼 금세 시동이 걸린다. 차 안에서 천국을 느껴보긴 처음이다.
조심조심 눈에 덮여 미끄러운 산길을 빠져나와 큰길을 만나니 이제 여유가 생긴다. "배낭에 김밥이랑 고구마랑 계란 있는데 먹을래?" "네 지금 식당도 없으니 먹고 가시죠. 아! 편의점 들러서 컵라면이랑 같이 먹을걸 그랬어요" "그러게ㅠ" 우린 편의점 있는 곳을 지나온 줄 알았다. 한참 더 가니 아까 그 편의점이 나타난다. "어 엄청 멀었네요." 8km가 아니라 아까 아저씨 말대로 13Km 아냐 싶다.
혁인 우동에, 난 처음 먹어보는 참깨라면에 김밥, 고구마랑 너무 맛있게 먹었다. "지난번 백숙보다 맛있었어요" "맞어 맛은 가격과 비례하진 않는 것 같다" 우하하하... 즐거웠던 화악산 산행은 이렇게 마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