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설날 연휴를 맞아 한 해 동안 활력을 줄 산행을 위해 명지산(1,267m)으로 향했다. 여럿이면 안전한 등산로로 가겠지만 혼자라 아무도 안가 본 샛길을 택했다. 난 그래도 길이 흔적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백둔마을에서 산으로 접어드는 순간 길이 보이질 않는다. 사람의 흔적이 끊긴 곳엔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키 낮은 나무들이 빽빽하고 가시덤불이 쌓여 더 진행할 수가 없다.
그래도 뚫고 간다. 쓰러진 썩은 나무 더미와 덩굴로 꽉 막힌 계곡을 넘으니 깎아지른 산비탈과 아슬아슬한 벼랑이 기다린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길
이미 산속 깊이 들어왔다. 막막한 산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시 내려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지금까지 덤불숲을 뚫고 왔는데 다시 가기 싫다. 내려간 뒤 다른 길로 다시 오를 일도 막막하다.
그냥 가보자. 이럴 때 도전도 해보는 거지.
거의 90도에 가까운 산비탈을 끊임없이 오른다. 해발 1,267m 높이의 큰 산을 길 없이 이렇게 올라야 하다니.
길이 없다 보니 낭떠러지를 아슬아슬 오르는데 밟는 대로 흙이 떨어져 나간다.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나무뿌리와 줄기를 부여잡고 가슴이 콩알이 되어 한발 한발 오른다.
산은 무단 침입자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자연이 허락하고 산이 내어준 등산로를 통해서만 산에 올라야 하는데 난 지금 어쩌다 보니 산의 섭리를 거역하고 있다.
푹푹 빠지는 눈길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태곳적 산비탈을 한걸음 한걸음 오른다. 비탈에 쓰러진 고목 사이로 저 멀리 산봉우리가 보인다. 명지2봉(1,250m)과 그 앞쪽의 작은 봉우리이다. 어느새 많이 왔네. 희망이 솟는다.
드디어 명지2봉이 보이는곳까지 왔다.
드디어 백둔봉과 제2봉 사이 능선을 만났다. 반갑다! 반갑다! 이제 고생 끝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능선도 정식 등산로가 아닌, 지도에 점선으로 표시된 샛길이라 그런지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다.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밑에서 시작할 땐 청명하고 따뜻한 봄날을 느꼈는데, 해발 1,000m 가까워오니 능선 북편 쪽으로 눈이 푹푹 빠진다.
구사일생했던 절벽
일단 쓰러진 나무줄기에 앉아 육포를 좀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눈에 동물 발자국이 찍혀 있다. 동물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암벽 밑에서 끊겨 있다. 다른 길이 없으니 이 암벽을 넘으면 길이 보일까?
암벽을 타고 아슬아슬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 맨 위에 마지막으로 손을 뻗으면 된다. 팔을 뻗어 힘을 다해 올라서려는 순간 발을 디딘 바위가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돌출된 바위가 있어서 디뎠는데, 밑에 바위 위에 그냥 얹혀 있는 형태라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하마터면 그 바위가 균형을 잃고 같이 떨어질 뻔했다.
안 되겠다. 내 생명이 소중하니 포기하고 간신히 암벽을 다시 내려온다.
눈이 허벅지까지 푹푹 들어가는 암벽 옆 응달로 돌아간다.
절벽을 돌아 눈에 빠지는 비탈로 내려선다.
삶의 겸허 가르치는 산
제2봉이 가까워오면서 제법 길이 보인다. 양지바른 언덕에 오르니 가운데가 뻥 뚫린 큰고목이 있다. 숱한 가지를 뻗으며 수많은 세월의 한설을 말없이 견뎌냈을 나무는 이제 가졌던 모든 것을 떨어내고 속마저 비운 채 마지막 삶의 길을 찾고 있다.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가 존경스럽다. 나무 속에 들어가 존경스런 나무와 하나가 되어본다.
가졌던 모든 것을 떨어내고 속마저 비운 채 마지막 삶의 길을 찾고 있는 고목에게서 겸손을 배운다.
오르는 길에 싸리나무 숲을 뚫고 전망 포인트에 잠시 서 본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 시원한 전망을 갖기 위해 산에 가는 게 아닐까. 산에 올라야 산이 보인다. 아무리 높아도 한발한발 올라야 하고, 힘들인 만큼 얻는 것이 가치 있다. 산은 정석의 삶, 겸허의 삶을 가르친다.
제2봉으로 오르는 길에 찾은 전망 포인트
정상을 대신한 제2봉
눈길을 오르고 또 올라 드디어 제2봉의 30m 앞이다. 아재비고개에서 올라오는 제대로 생긴 정식 등산로를 처음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벌써 오후 5시가 다돼간다. 어서 빨리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정상과 거의 비슷한 높이인 제2봉(1,250m)에 오른 것으로 만족하고 이번엔 정식 등산로로 내려간다.
제2봉을 찍고(좌) 50cm 이상 눈이 쌓인 하산길로 내려선다.(우)
해 지는 제3봉의 추억
제3봉(1199봉)에 도착하니 서산으로 지는 해에 온 산이 물들고 있다. 자연만이 이렇게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 수 있음이 경외스럽다. 하산 시간 때문에 이 높은 해발 1,200m의 고지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은데 내가 그 시간을 맞았다니 행복해진다.
사방이 산인 바위 절벽위에서 노을 속 고요에 빠져든다.
인간은 어떨 때 행복을 느낄까.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있을 때 누구라도 행복해진다. 달이 차면 기울까를 걱정하듯 행복할 수록 그 순간을 잃을까도 걱정한다. 그래서 가까울 수도, 멀 수도, 그저 마음으로, 느낌으로 하나되는 순간을 가질 수 있음이 행복할 뿐이다.
저물녁 그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부를수록 멀어져 서쪽 산이 되지요
그대가 나를 감싸는 노을로 오리라고 믿으면서요
하고 싶은 말 가슴에 깊이 숨기고 그대의 먼산이 되지요
- <먼 산> 안도현
이 적막강산에 해와 산과 자연만이 유일한 벗이다. 해는 지고 있지만 내려가고 싶지가 않다. 이 순간을 만끽한다.
1,200m 고지인 제3봉에서 노을을 만나다.
길은 안 보이고 들개 소리만
내려가는 능선 길은 눈이 녹아 진흙 길이 많다. 드디어 아재비고개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백둔계곡의 마을 까지는 약 4.2km이다. 그러나 이미 어둠이 엄습했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캄캄한 어둠에 잠긴 아재비 고개
랜턴을 켜고 내려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오직 나만 불을 밝히고 있다. 굶은 산짐승들이 있다면 표적이 될 수도 있다.
내려가다 보니 얼음으로 변한 계곡물이 길을 모두 덮고 있어서 어디가 길이고 계곡인지 분간이 안된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 속 계곡에 갇혔다.
길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끼잉 끼잉 하는 여러 마리의 들개 소리가 들린다. 하이에나 생각이 난다. 하이에나는 떼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사자도 공격하곤 한다. 저놈들이 날 보고 있을까 싶다. 혹시 내가 공격 대상이 될까? 식은땀이 흐른다. 공격한다면 난 스틱이 있다.
새삼 고마웠던 리본
계곡 얼음 위에서 여기 저기 길을 찾는다. 산에서 길을 잃고 조난 당하고 죽는 경우도 봤기 때문에 예사롭지 않다. 원래는 겨울엔 4시 전에 하산해야 하지만 오늘은 길없는 길로 오르다 보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길이 안보이니 GPS로 방향을 찾는다. 하산 방향을 따라 길을 찾다가 리본을 발견했다. 그동안 자연훼손이라고 생각했던 리본이 이리도 고마울 수가. 계곡을 건넌 곳 숲속으로 길이 있다.
산행을 하다 보면 가끔 사람이 지나갔을 거라고 보이지 않는 인적 없는 산속에 간혹 하나씩 걸려 있는 리본을 보면 반갑고 고맙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를 때도 능선을 만났을 때 특별한 리본을 봤었다. 산악회 이름도 없이 "나는 산이다"라고 펜으로 직접 쓴 리본이었다. 그걸 보고 진짜 산꾼인가보다 하고 헛웃음과 함께 반가웠던 생각이난다.
이제는 들개 소리가 떼로 들린다. 끼잉끼잉 하는 들개 소리가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다. 긴장한 채 차분차분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들개의 공격은 없었고 나는 무사히 내려왔다.
배고픔 달래준 식당
차를 세워둔 곳까지 내려오니 밤 8시, 배는 고프지만 성취감과 뿌듯함이 최고다. 올 한 해도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뚫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올해도 편한 한 해는 아니겠지만 오히려 가장 에너제틱하고 건강한 체력을 키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래본다.
오는 길에 가평 시내에서 식당을 찾는데 다 닫힌 쓸쓸한 거리다. 다행히도 유일하게 날 반겨줬던 닭찜 집, 거기서 맛본 김치 맛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행복은 아주 작은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