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 가볼 수는 없지만 남한 쪽 고성으로 뻗어 있는 금강산 줄기를 걸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4월 16일, 금강산 신선대를 찾아가 보았다.
금강산 최남단 사찰 화암사로 가는 호젓한 길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 번째 사찰
금강산 1만 2천 봉 중 다섯 봉이 남한 쪽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금강산의 산줄기가 가장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곳이 고성 토성면 신평리인데, 이곳에 금강산의 최남단 봉우리, 1만 2천 봉 중 제1봉인 신선봉(1,212m)이 있다.
신선봉 기슭엔 금강산의 팔만구암자 중 최남단에 있는 첫 번째 사찰인 천년고찰 금강산 화암사(전통사찰 제27호)가 있다. 남한에선 건봉사와 화암사 두 사찰이 금강산에 속해 있다.
화암사는 신라 때(769년) 진표율사가 창건한 비구니 도량으로 정조대왕이 관음보살상 6첩 서병(해방 후 사라짐)을 하사했던 사찰이다. 현재 진표율사가 절 창건 당시 함께 짓고, 1401년 개축한 부속 암자 미타암과 죽암당부도를 비롯한 1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금강산화암사 일주문
신록의 연녹색이 꽉 찬 숲길을 걷다
금강산 제1봉인 신선봉 자락에 위치해 있는 깨끗한 화암골을 비롯해 화암폭포, 수바위, 울산바위 등 화암사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특히 신선대에서 마주 보는 울산바위와 미시령의 숲과 자연 절경은 정말로 신선이 된 기분이 들게 한다.
오전 10시경 깊은 산골짜기 같은 화암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초목들마저 새롭다. 낯설지만 너무 맑고 신선한 느낌의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신선봉에서 흐르는 신선계곡의 콸콸 물소리를 들으며 신록의 연녹색이 꽉 찬 숲길을 걷는다. 호사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이보다 큰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신록이 연한 잎을 내는 지금이 걷기에 가장 좋은 때인 것 같다.
콸콸 물소리가 시원한 신선계곡 옆으로 난 신록 우거진 산책로를 걷는다.
불도 사무쳐 전설 간직한 거대 수바위
숲길 산책로를 지나 화암사 바로 앞 수바위 들머리에서 쌀바위라고도 하는 수바위로 향한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역대 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했다는 수바위다. 화암사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스님들이 시주를 청하기 어려웠는데 산신령이 가르쳐 준 대로 수바위에 난 구멍에 지팡이로 세 번 흔들면 쌀이 나와 식량 걱정 없이 불도에 열중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바위이다.
가보니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다. 등산로에서 볼 땐 수바위의 중간쯤이라 저쪽 밑에서부터 보면 아파트 20층 높이도 더 돼 보인다.
수바위 꼭대기엔 물웅덩이가 있다. 가뭄에 이 물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는 신비의 웅덩이다. 불도가 사무쳐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이 같은 전설들이 수바위에 새겨진 것이 아닐까.
물웅덩이를 보러 수바위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고 싶지만 너무 가파르고 아찔해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등산로에서 바라봐도 거대한 수바위(좌), 조금 올라서 보니 옆은 천길 낭떠러지이다.(우)
화암전망바위에 올랐으나 가슴이 철렁
바위가 마치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놓인 신기한 시루떡 바위를 지난다. 오르는 등산로 가로 연록 잎이 꽉 찬 숲이 마치 비밀 정원을 걷는 느낌이다.
신선대 가는 등산로가 '화암사 숲길' 이름 대로 산책길처럼 편안하고 예쁘다.
시루떡 바위(좌), 등산로변 신록에 덮인 숲(우)
드디어 화암사 전망바위에 도착했다. 그림 같은 동해안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바위라 잔뜩 기대를 안고 올랐는데 온통 안개가 꽉 차 바위 외엔 세상이 모두 하얗다. 가슴이 철렁한다. 오늘 신선대에서 울산바위를 마주하려던 기대가 무너진다.
그래도 왔으니 울산바위 조망처인 신선대로 향한다.
동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화암전망바위. 이 날은 운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와 설악산 대자연의 합주처 신선대
신선대는 금강산 제1봉인 신선봉에서 상봉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최종으로 모여 직하 절벽을 형성한 거대 암반이다. 금강산 끝에서 미시령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을 마주 조우하는 맛은 백미이다.
특히 웅대한 울산바위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미국 모뉴먼트 밸리는 황야에 솟은 암벽이 배경처럼 다가온다면 이곳에서 보는 울산바위는 높은 산 위에 솟아오른 거대 성벽 같은 위용에 압도되고 만다.
더욱이 오른쪽으로 설악산 황철봉과 왼쪽으로 달마봉, 밑으로는 미시령 계곡의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대자연의 한복판에 놓인 감동을 맛보게 되는 곳이다.(나도 조금 후에 그 감동을, 그보다 더할 수도 있는 감동을 직접 맛본다.)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청정 동해와 아름다운 해안선, 그 속의 해안 도시 속초의 모습과 가까이 숲 속 등대 같은 수바위까지 훤히 꿰뚫어 보이는 맛이 어디서도 이런 다양한 전망과 일품 풍광을 즐기지 못하는 곳이다.
신선대와 낙타바위. 오늘은 운무가 짙게 끼어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좋다는 절경을 보고 가야지"
그러나,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짙은 운무가 산을 에워싸고 나도 운무에 갇혔다. 가끔 발 밑에 미시령 쪽이 희미하게 열리기도 하지만 울산바위는 조금의 틈도 없이 운무에 꽉 가려 어디가 울산바위인지조차 모를 만큼 신비에 싸여 있을 뿐이다.
점심 식사를 하며 혹시나 걷힐까를 기다려 보았지만 기대했던 웅장한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무가 짙어진다.
기다려 봤지만 울산바위가 열리지 않는다.
포기하고 화암사까지 내려왔다. (실은 '화암사 숲길' 코스로 선인재 쪽으로 한 바퀴 돌아 내려와야 하지만 오늘 다음 산행지인 울산바위에 갈 요량으로 부랴부랴 내려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늘에 밝은 기색이 돈다. 여기선 멀리까지 막힘없이 보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좋다는 절경을 보고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 희미하게 동해와 해안선이 보인다.
하루 두 번 오른 신선대
신선대로 다시 오른다. 사람들이 모두 내려오기만 하는데 절경을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거꾸로 올라간다. 정상이 얼마 안 남았는데 방금 전 내려올 때도 주변이 걷히며 바다도 어렴풋이 보였는데 다시 구름이 잔뜩 낀다. 처음 올라왔을 때보다 더 짙다.
실망이 연속되면 자연스레 포기가 된다. 그래도 올라온 김에 다시 신선대를 찍고 내려갈 생각에 전망바위를 지나 신선대 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아! 이젠 비까지 온다. 어느새 우산 쓴 사람도 보인다. 우두두두... 우산도 비옷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는다. 일기예보를 믿고 올라온 내가 잘못이란 생각이 든다.(나중에 일기예보를 보니 이날 대기불안정으로 일부 강원도 지역에선 우박도 내렸다고 한다.)
어디서 잘 걷는 것 같아 보이는 일행 4명이 "비가 오네. 오늘을 못 보겠네. 그래도 낙타바위도 보고 왔다 갔다는 인증샷이라도 찍게 가자" 하며 지나간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우산 쓴 사람이 보인다.(좌) 신선대의 거대 암반. 인증샷이라도 남기자며 끝 쪽으로 가는 등산객 4명이 보인다.(우)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기적이
매번 느끼지만 알 수 없는 게 자연이다. 인생을 하루 앞도 모른다고 했는데, 자연의 조화는 1분 앞을 모른다. 인간이 자연 속에 들어가는 순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의 조화에 내맡기는 겸허함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자연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
산행을 할 때도 자연을 거스르거나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길을 무모하게 가서는 안 된다. 호기롭게 길 없는 길을 많이 다녀 봤지만, 등산로는 자연이 인간을 위해 내어 준 너무도 소중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감사함으로 자연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자연이 허락해 준 길을 걸어야 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일말의 희망도 접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채 비 오는 신선대에 섰는데, 아! 그 순간 눈앞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운무가 산을 내려오면서 강물처럼 미시령 계곡을 흐르고 울산바위 꼭대기가 열리기 시작한다. 아무 기대 없던 순간에 가장 위대한 자연의 조화와 맞닥뜨렸다.
자연이 베푼 최고의 향연
앞서 지나갔던 4명이 우비를 꺼내다 환호성을 지르며 한 명 한 명 신선대 절벽 위에 서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나는 셀카로 만족하다가 그분들의 사진 찍기가 끝나갈 무렵 슬그머니 "저도 한 장만" 하고 핸드폰을 내민다. 흔쾌히 받아준 분은 한 장이 아니라 여러 번 셔터를 눌러 주신다.
아! 카메라 앞에 절벽에 서는 순간 더 실감 나게 다시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발아래 구름이 계곡을 휘감고 울산바위와 설악산 봉우리들이 장대한 신비를 드러낸다. 멀끔한 모습을 바라봤다면 이만큼 설레고 신기하고 가슴 벅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자연이 베푼 최고의 향연이었다.
환상적인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마도 시간을 쟀다면 1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감흥은 영원히 남을 것 같다. 질은 결코 양이나 시간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내내 닫혀있다 열리는 환상적인 장면에 환호성이 절로 난다.
마음 가득 자연을 담다
내려오는 길이 뿌듯하다. 두 번 오른 보람으로 꽉 찼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올라올 때 못 봤던 아름다운 숲과 길이 보인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시인의 <그 꽃> 시가 이래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나 보다.
여유로운 하산길에 수바위 한 귀퉁이에도 앉아 본다.
수바위 들머리로 내려섰다. 아래 쪽 산책로로 들어서서 신록의 숲길을 호젓하게 걷는다. 아무도 없는 숲 속 길에서 금강산 제1봉 신선봉에서 흘러내린 청정 계곡물소리만 하염없이 마음을 두드린다. 색이 너무 예뻐 투명한 빛을 내는 신록은 이미 내 마음 가득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