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아들만 6명인 집에 낀 딸 하나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는데, 열 살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아마 자매라도 하나 있었다면 엄마의 삶이 좀 달라졌을까?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한테 외할머니인 그 여자는 딱 하나 있는 딸을 지독히도 못 살게 굴었다. 엄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한번은 남동생들 먹일 밥상을 들고 가다가 무거워서 엎고 말았다. 그날 엄마는 그 여자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엄마의 나이 7살 때였다.
엄마는 어렸을 때 영어도 곧잘 했고 학교에선 늘 1등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엄마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집에 돌봐야 할 오빠들과 남동생들이 있었으므로. 엄마는 앞뒤로 동생들을 업고 다니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 심지어는 교장 선생님까지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와 중학교까지는 보내달라며 그 여자에게 사정했다. 물론 엄마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무슨 여자애가 공부를 하냐며, 그 여자는 엄마를 때리고 집에 가뒀다. 70년대 작은 시골 동네. 남존여비 사상이나 가난한 집안사정은 뭐 다들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학교도 가지 못한 사람은 동네에 엄마뿐이었다. 다들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때, 14살이던 엄마는 근무복을 입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엄마는 친구들과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서 몇 정거장을 걸어 다녔다.
전태일이 분신한 시기가 딱 1970년이다. 그 후에도 공장의 여건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엄마는 창문 하나 없는 곳에서 하루에 10시간 넘게 쭈그려 앉아 일했다. 그녀의 나이 14살.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일을 해 번 돈은 고스란히 오빠의 대학교 학비로 들어갔다. 당시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17살, 20살 남짓의 언니들이 어린 엄마를 안쓰러워하며 따로 먹을 걸 챙겨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들도 한참 어린 나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에겐 별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 여자의 학대를 못 이긴 엄마는 결국 15살에 집을 떠난다. 맞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빠를 만나 결혼하기까지, 10년 넘게 공장 기숙사를 떠돌며 일했다. 그 시절 엄마가 그 여자와 가족들에게 쓴 편지에는 보고 싶다, 고향이 그립다거나 한 이야기들이 쓰여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엄마에게 보낸 몇 안 되는 답장엔, 동생에게 새 옷을 사입혀야 하니 돈을 더 부치라는 둥의 이야기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의 엄마는 아직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난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순간부터, 엄마가 그 여자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며 자랐다. 욕이기도 했고, 때로는 "왜 우리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는 눈물 섞인 호소이기도했다. 나에게는 '할머니'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단 하나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가 죽도록 미웠고, 좀 더 자라서는 그 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엄마에게 친정이 되어주겠노라 약속했다. 심지어 아빠는 젊은 시절 바람을 피우면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불쌍한 우리 엄마. 이게 내가 엄마에게 가졌던 감정 대부분이다. 엄마는 때때로, 너 때문에 집을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엄마의 입장은 그만큼 날 사랑한다는 거겠지. 하지만 어린 딸이 엄마에게 죄책감을 갖는 게 정말 정상적인 걸까?
아들과 딸 차별, 바람난 부모, 폭력적인 아빠, 끔찍한 시집 살이, 가난 등등. 사실 주변 친구들과 터놓고 가정사를 얘기하다 보면 하나쯤은 나오는 소재들이다. 그래서 적어도 한국에 사는 동안엔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의 '사랑'이 어떤 건지에 대해 말이다.
폭력적인 데다 생활력도 없고, 바람까지 피운 아빠. 엄마의 30대는 그런 아빠가 벌려놓은 일들을 수습하며 치열하게 지나갔다. 왜 이혼하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엄마에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애 하나 먹여 살리는 것쯤은 힘들긴 해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완벽한 가족을 주고 싶었다. 엄마가 아빠 때문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다 같이 죽으려고 했을 때 8살이던 나는 죽기 싫다고 울다가 경기를 일으켰고, 결국 엄마가 혼자 집을 떠나려고 했을 때 9살의 난 제발 집을 나가지 말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빠를 용서해 달라고 했던 것도 같다. 잘 기억나진 않는다. 나이가 어렸던 것도 있고, 안 좋은 일은 기억에서 지우는 습관 때문인데. 덕분에 끔찍한 일일수록 아예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오래전 본 영화 예고편 정도로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엄마는 언제나 내게 이런 일화들을 얘기해 주며, "그래서 엄마는 참고 살았다."라고 했다.
엄마는 평생 자신의 엄마가 준 그늘에서 살았다. 계집애가 무슨 책을 읽냐며 읽던 책을 다 찢겼을 때도, 어린 날의 엄마는 나중에 자신이 엄마가 된다면 절대 저런 엄마는 되지 않아야지 다짐했다. 자식이 딸이든 아들이든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노라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맞다. 엄마의 사랑은 정말 헌신적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집이 가난하긴 했었지만, 엄마는 자신이 며칠 밥을 굶더라도 나를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려갔고, 밤을 새서 부업을 해서라도 나를 가르쳤다. 그리고 나를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용서했으며, 가정을 지켜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집은 아주 평온하며 적당히 먹고 살만 하다. 아마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다들 놀랄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모든 평화는 엄마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이렇게까지 옥죄여 올 줄은, 이전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에게 주어진 엄마는 오직 자신의 엄마, 그러니까 그 여자뿐이었다. 딸이라고 가르치지도 않고, 딸이어서 마구 때려도 되고, 딸이니까 분이 풀릴 때까지 욕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바로 그 여자말이다. 그런 엄마가 보기에 나의 삶은 얼마나 쾌적한가? 난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나왔고, 그 후엔 유럽으로 가서 살았다. 심지어 대학원까지 갔다. 어린 엄마는 재능을 펼칠 기회는커녕, 중학교도 가지 못했는데.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엄마의 유일한 편이 되어주셨던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는 집안에 벌어지는 온갖 일에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딸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마찬가지로 딸로 태어난 난, 엄마가 모든 것을 다 막아주었기 때문에 '보통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키웠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편한 인생을 살았다. 그 여자 같은 엄마를 안 만나고, 엄마 같은 엄마를 만나서 운이 좋았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말이다.
나는 한번도 엄마에게 고민 상담을 해본 적이 없다. 일단 엄마가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어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토록 강인하게 나와 가정을 지켜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엄마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게 했던 온갖 푸념과 하소연, 고달픈 인생에 대한 한이 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엄마의 삶은 슬펐다. 어릴 때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엄마로 꼽아온 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정도로. 때문에 엄마는 늘 내게 불쌍한 사람, 지켜줘야 할 사람 그리고 나 때문에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한들 얼마나 큰 일이겠는가? 엄마는 온갖 역경을 딛고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퇴거 명령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도, 엄마가 겪은 온갖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이민국은 문을 닫고, 보험이 없어 인대가 찢어져도 진통제만 먹으며 견딘다고 하더라도. 정말 여전히, 엄마의 인생에 비하면 그냥 사서 하는 고생일 뿐이다. 아무도 유럽에 가서 살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퇴사를 했을 때도, 엄마는 "원래 남의 돈 벌기가 어려운 법이야."라고 말했다. 엄마에게 엄마의 삶은 너무 크다. 엄마는 너무나 많은 역경을 이겨냈다. 뉴스에서 누군가 자살을 하더라도, 고작 그런 일로.. 부모님 속상하게 목숨을 끊은 나약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엄마에게 고민을 말하고, 의지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엄마의 삶에 벌어진 대부분의 불운이, 엄마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임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 유럽에 간 것도 나의 선택, 취업이 잘 되지 않는 분야를 고른 것도, 진지한 연애할 생각 없는 나이 어린 남자와 사귄 것도,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서 굳이 국적을 바꾸려고 아둥바둥하는 것도 모두 다 나의 선택인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벌어지는 어떤 고충을 털어놓는다고 한들, 엄마는 날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내 고민이나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엄마 입장에선, 한국에서 대학까지 가르쳐 놨더니 굳이 남의 나라로 가서 살려고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잘 살 수 있게 키워놨더니, 도대체 왜? 어떻게 보면 엄마가 30년간 피땀 흘려가며 일군 나의 삶은 엄마가 가장 원했던 삶이었을 테니까. 나도 가끔은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동시에 이 모든 게 결국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엄마는 내가 평범한 삶을 살며 행복하길 바라는 거다. 그냥 남들처럼 적당한 나이에 한국 남자랑 결혼해서 애는 둘 쯤 낳고 사는 것. 아, 얼마나 다정한 염려인가?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그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결국 엄마에게 난 굳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특이한 딸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키워냈는데 말이다.
고등학생 때까지 살던 지방 소도시를 떠나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래도 예체능인 탓도 컸겠지만,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대학 동기들부터 시작해서 소모임, 페스티벌, 술집 흡연 장소,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 누구는 아빠가 뉴스에까지 나오는 외교관이었고, 다른 누구는 할아버지에게 50억 유산을 상속받았다. 아빠가 대기업 임원이었던 친구는 졸업하고 할 일이 없다며 억지로 미국 유학을 갔다. 나는 고깃집에서 불판을 나르며 비행기 티켓값을 모으고, 구글 번역기로 영어를 공부해서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은 더 놀라웠다. 가장 비싼 구역의 2층 집에 자취하면서, 부모님 회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친구. 비자를 연장하려고 10년 동안 그 비싼 대학을 몇 번씩 다니는 언니. 내가 한국에서 나왔던 대학은 유럽에 가니 아무것도 아니었고, 적어도 내가 만났던 유학생들의 삶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럼 이쯤에서, 내가 돈이 많은 부모님 얘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꺼낸 것인가? 나는 돈이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돈이 중요하면 미쳤다고 예술을 하고 살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건 꿈과 자유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게 내가 봤던 부모님들이라는 것이다.
이 나이를 먹고 돈 많은 남의 집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을 비교하려는 건 아니다. 엄마는 정말 청춘을 바쳐서 나를 키워주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 그러나.
엄마의 갱년기가 시작되고, 그 후 내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서 크고 작은 언쟁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한다. "다른 엄마들 같았으면 너 머리채라도 잡고 두들겨 팼을 거야!" 그러니 감사한 줄 알라는 것이다. 혹은 "넌 니 외할머니한테 안 태어나고 나 같은 엄마 만난 걸 다행으로 알아!"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 가지고 머리채를 잡는 엄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봤던, 다른 엄마들은 딸과 밤새 대화를 나누고, 나란히 담배를 피우거나 영화를 보러 간다. 함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한다. 뭐 잡지에서 인터뷰를 하거나, 용돈을 백만 원씩 쥐여주는 엄마들까지 갈 것도 없다.
나는 엄마가 살아온 삶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엄마는 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나를 키웠다고 말한다.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할 때도 많다. 나의 불쌍한 엄마... 엄마는 최선을 다해 나를 키워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나에게 심한 말을 한 후에서조차 내가 엄마를 억지로 용서할 필요가 있는 걸까? 엄마의 삶에 비해, 나는 턱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엄마가 내게 주는 상처들도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슬픈 이야기지만, 엄마가 겪은 엄마는 그 여자뿐이다. 엄마는 항상 어떻게든 그 여자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엄마의 일생에 거친 과제였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엄마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나온 후 대학에 갔고, 지금은 원하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가정을 지켰고, 딸인 나를 대학에 보내줬으며, 얘기도 잘 들어주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어떤 고민이나 문제를 얘기해도 엄마에겐 고민으로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겠지만. 그저 엄마 말마따나 '너무 많이 배워버린' 내가 본 세상이, 엄마가 겪었던 그 여자의 그 이상이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엄마가 그 여자와 달라지기 위해 일생을 걸어서 내게 준 것들- 엄마가 언제나 감사한 줄 알라고 말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세상을 보고 말았다.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서울로 대학을 간 사람이 전교에 10명도 안 됐다. 엄마 친구의 딸들은 모두 같은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가서 치위생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 그대로 정착했고 결혼해서 애를 둘셋 쯤 낳았다. 엄마 친구들은 사정도 어려우면서 굳이 딸을 서울로 보내느냐고 하곤 했다. 엄마는 늘 말했다. 난 널 서울로 보내줬다고. 물론 이 앞에는 '난 가고 싶어도 제때 못 갔던 대학을, 넌 큰돈 들여서 보내준'이라는 수식어가 숨겨져 있다. 서울로 대학을 간 것,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한 것, 용돈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즐긴 것. 맞다. 우리집 형편에,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이었는지. 나중에 내 돈으로 대학원을 다닐 때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내가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잘 간 것을, 왜 내게 죄책감을 주는 용도로 쓰는 것인가? 하는 거다. 엄마도 결국 내가 잘 되길 바라면서. 도대체 왜? 그리고 이 모든 게 결국, 엄마에겐 그 여자가 기준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10년 만에 깨닫게 되었다.
아이를 왜 낳고 싶지 않은가? 자세히 들어가자면 할 얘기는 많다. 반대로 아이를 낳고 싶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사람은 알겠지. 그러나 가장 큰 건, 그 여자와 엄마, 그리고 결국 엄마와 나까지 내려온 이 사슬을 끊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어야만 한다.
우리집에서 오랜 시간 금기로 여겨졌던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아빠의 바람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엄마가 외할머니를 닮았다는 얘기였다. 엄마는 그 여자와 어떤 식으로든 닮았다는 얘기가 나오면 불처럼 화를 냈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 도리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그 여자와 잘 지내려고 하고 있지만.
그 여자는 나이가 80이 넘은 지금도 꼬장꼬장한 성격과 자신이 인생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생각을 안고 산다. 불쌍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 때문에 여전히 일을 나간다. 말마따나. 내가 그 여자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는 여기 다 쓸 수도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 여자에 대한 악담(그리고 진실인.)만을 듣고 자랐고, 엄마가 몇 년 전부터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것조차 그 여자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웃긴 얘기는, 그 여자와 아빠 모두 엄마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서로의 탓으로만 돌린다는 것이다. 절대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여자는 엄마가 아파서 몇 달 내내 집에 누워있을 때조차 한번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어디 가서 사고를 쳤기 때문에. 나이 들어가는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점점 그 여자가 보일 때, 그리고 엄마와 닮은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자각할 때... 노화에 대해 얼마나 큰 공포와 거부감이 드는지. 그리고 최근에야 깨달은 사실은 엄마도 그 여자와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같은 결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 그 여자와 닮지 않으려고 평생을 싸운 엄마가 결국 그 여자의 그늘 아래에서 나를 아프게 하는 거다. 어쩌면 나의 인생 전체에.
그 여자 밑에서 자란 엄마는, 그 여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어쨌든 대학을 보내줬고, 허물없이 지내고 있으며 등등의 이유로 그 여자와는 전혀 다른, '이상적인 엄마'가 된 엄마. 겉으로 보기엔 그 여자와 전혀 다른 엄마가 된 엄마. 그래서 엄마에게 대단한 무게를 끼치는 건, 이상적인 엄마의 그 모습뿐이다. 나를 생각하고,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그 숭고한 사랑조차도 그 테두리 안에 있다. 나의 인생, 나의 감정, 나의 고민은 언제나 그 주위를 빙빙 맴돈다. 가끔 상처를 받을 때도, 결국엔 그 앞에 앉아서 엄마의 아픔을 다시 한번 감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그리고 엄마를 안아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진작에 엄마에게 내 마음을 다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그 여자와의 관계 때문에, 늘 하나뿐인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이상적인 모녀관계'를 쌓고 싶어 하고, 그러나 그럴 수 없는 내 성격 때문에, 유럽에서 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엄마에게 상처를 준 못된 딸이 되었다는 죄책감 또한 내 몫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그 여자의 모습과 방식으로 내게 슬픔을 주는 엄마. 자신의 아픔만이 가장 아픈 엄마. 그렇기에 자신의 어떤 작은 결점도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 그럼에도 일생동안 최선을 다해 딸을 키워냈으니, 가장 이상적인 엄마가 된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나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고.. 엄마에 대한 미움이 들 때면, 엄마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그 여자에 대해서 생각한다. 엄마는 그 여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희생했나. 그리고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닮은 방법으로 나를 아프게 하는가.
"너도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 대한민국에서 제일 자주 쓰이는 엄마들의 대사 모음이 있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은 말이다. 딸은 언젠가 엄마가 되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그리고 또다시 엄마가 된 딸과 그녀의 딸. 이어지는 모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아름답고 무섭거나 처절하다. 직접 자식을 낳아서 엄마가 되고, 또 내 딸이 자식을 낳아 다시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건, 단순히 대가 이어진다는 것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딸은 엄마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도 어쩌면 그렇게 나왔겠지.
다만 엄마가 평생 도망치고자 했던 그 여자의 그림자를 엄마에게서 보게 될 때, 그리고 그건 엄마에겐 보이지 않는, 등 뒤에 꿰매진 명암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나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이어받게 될 것이고, 내 딸 혹은 아들이 지금 나와 같은 얽힌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아이가 없는 내 삶이 다소 외롭고 텅 비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괜스레 겁을 먹고 미리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니다. 단순히 일이년을 고민하고 내리는 결정도 아니다. 그건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평생 노력한 우리 엄마는 너무나 대단하고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고, 나 또한 엄마 같은 엄마는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