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요. 잘 지내고 있나요? 이 곳, 서울은 봄이 지나고 곧 여름이 오려나 봐요.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것 같네요.
그곳은 어떤가요? 주변 이웃들은 잘 대해주나요?
미카엘과 조세프, 마리는 건강하게 잘 있지요? 조세프와 마리는 학교에 잘 적응해서 다니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질문이 너무 많죠. 안나가 잘 지내는지 너무 궁금해요.
Pierre Bonnard, 《 The letter 》
지난번 안나가 보내준 사진 잘 받아 보았어요.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안나의 어깨가 무거워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새로운 곳에서 밭 일과 집안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 거예요. 그만큼 안나는 모든 걸 더 잘 해내기 위해 더 힘들 거라고 생각되고요.
Anna ancher, 《 Harvesters 》
안나, 우리 힘들 땐 하나씩 내려놓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 잘하려 애쓰지 말고 이제 힘들 때는 하나씩 어깨에서 잠시만 내려놓아볼까요. 엄마로서 아내로서 또 밭을 일구는 농부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겠지만 안나를 위해서 말이에요.
다 잘하지 않아도, 다 잘하지 못해도 안나는 충분히 멋있고 따뜻한 사람인 걸요.
안나의 사진을 보면서 제 자신도 한번 돌아보게 되었어요. 과연 나도 안나처럼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회사일과 병행하면서 뭐든 다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요. 지금은 물론 자신이 없어요. 지금 제 자신 하나 간수하는 것도 힘든데 말이죠.
참, 제가 결혼하고 회사에서 남자 상사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는지 알아요? "남편 밥은 차려주니?" 였어요. 시대가 변했다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아직도 일부 어른들은 남녀가 결혼을 하면 마땅히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에드가 드가, 《Woman ironing》
다행히 제 배우자는 저보다 집안일과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라서 저보다 많은 일을 집에서 도맡아 하고 있지만요. 그런데 아직 제 자신이 틀에 박힌 사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봐요. 이따금씩 내가 맛있는 음식을 하고 부엌살림을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빳빳하게 다린 향기 나는 셔츠를 남편에게 매일 아침 건네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요. 그래서 남편에게 맛있는 집밥을 해주지 못하고 잘 챙겨주지 못하는 것 같아 때로는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하더라고요.
지난겨울에는 각종 인스턴트 음식과 바깥 음식에 저 스스로도 물리기도 하고 남들처럼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남편과 먹고 싶어서 퇴근 후 저녁에 집에 와서 간단히 음식을 차려서 함께 먹었어요. 어떤 음식보다 맛있게 먹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더라고요. 그로 인해 또 다른 행복감도 들고요.
Anna ancher, 《The maid in the kitchen》
그 행복한 기운을 업고 한두 달은 그런 생활을 지속했는데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주 52시간 근로자인 저에게 저녁시간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찬 시간이기 때문이죠. 운동도 해야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해야 하고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일이 참 많은데 집에서 음식을 하고 먹고 치우면 2시간은 훌렁 지나가 버리더라고요.
이렇게 저는 집에서 밥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안나는 어떻게 농부이자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내고 있나요? 제게 아직 아이는 없지만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다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해요.
Mary cassat, 《Emmie and her children》
이것도 잘하고 싶고 저것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 안나의 마음도 그런 건가요? 막상 안나에게 내려놓으라고 해놓고서는 저 또한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안나, 너무 제 푸념만 하게 된 것 같네요. 안나 덕분에 사회에서 여자 그리고 엄마라는 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안나의 답장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