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친가나 외가 쪽 친척 모두 시골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없었다. 명절이 되어도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빌라에서 아파트로, 빌라에서 주택으로 돌아다닐 뿐. 푸른 숲이나 강을 볼 기회는 없었다.
당시 사는 곳도 대단지 아파트 한복판이었다. 단지를 분류하는 앞번호만 해도 몇십 개나 되는 그야말로 아파트의 숲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은 그 숲속에서 만들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진 아파트의 숲은 나에게 최적의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는 '내일은 뭐 하고 놀지' 였다. 주된 일상은 고운 모래가 깔린 작은 놀이터에서 모래 범벅이 되도록 뒹굴거나, 주차장에 주차된 차 사이를 자전거로 내달리거나, 친구 집에 들어가 아줌마가 타주시는 코코아를 꿀꺽꿀꺽 들이켜는 것 따위의 일이었다. 웃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마냥 웃을 일이 넘치던 때였다.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를 부여잡고 버티다가 집 근처 역에서 내렸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양옆으로 아파트가 새카맣게 늘어섰다. 고개를 들어 아파트로 가려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하늘이다. 늦은 시간까지 놀다가 친구들이 하나씩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그제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두운 보도블록을 차근차근 밟다가 고개를 들면 울창한 아파트 숲에 가려진 별빛 사이를 구름이 거닐고 있었다.
나는 어느 이름 모를 아파트 단지 앞에서 멈춰 섰다. 단지로 통하는 작은 입구가 보인다. 정식으로 뚫린 곳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만들어진 길 같았다. 나는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방향을 바꾸었다. 옷장 속을 헤치고 들어가면 나타나는 마법의 세계처럼 눈앞에 거대한 아파트의 숲이 펼쳐졌다.
그날은 피곤함도 잊고, 아파트의 숲속을 몇 바퀴나 맴돌았다. 저 앞에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고개를 쳐들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늦가을 시린 바람이 그날만은 적당히 개운하고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