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

즐거움을 곁들인, 감각의 업그레이드

by 이키드로우

이 일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개는 이유를 묻는다.

재미있어서인지, 보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아직 충분히 힘들지 않아서인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좋아함’은

감정에 가깝기보다 감각에 가깝다.

이 일을 오래 하며

내 안에서 달라진 어떤 상태에 대한 이야기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이 일을 오래 할수록 이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은 분명 많아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확신은 줄어들고,

판단은 느려지며,

결론을 서두르는 일도 거의 사라진다.


예전에는

확신이 줄어드는 걸

자신감이 떨어진 결과로 오해했다.

전문가는 분명해야 하고,

답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건 퇴보가 아니라

감각이 바뀐 결과라는 것을.


이 일을 오래 할수록

사람을 빠르게 정의하지 않게 된다.

말보다 태도를 먼저 보게 되고,

계획보다 반복된 선택을 떠올리게 된다.

설명은 그다음이다.

설명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태도가 따라오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오래 남지 않는다는 걸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브랜딩은

속도가 빠른 일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의 삶과 태도,

그 안에서 굳어진 선택의 방식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무언가를 빠르게 정리해 주는 사람보다는

쉽게 단정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함부로 결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이 태도는

브랜드를 다루는 사람에게

생각보다 중요한 자질이다.


이 감각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을 하며

확신, 조급함,

전문가답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들이

하나씩 벗겨진 자리에서

조금씩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변화를

감각의 업그레이드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즐거움이 섞여 있다.

성과에서 오는 즐거움도 아니고,

인정받는 데서 오는 즐거움도 아니다.

조급해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쉽게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에 가깝다.


이 감각 덕분에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다른 일로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

이 상태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열정의 고백이 아니라,

이 감각을 지키고 싶다는 선택에 가깝다.


조금 느려도,

조금 불편해도,

돈보다 사람을 먼저 보게 만드는

이 감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