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귀하게 대하는 선택
존엄감은
누군가가 지켜줘서 생기는 게 아니다.
당연히
스스로 선택해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존엄감을
대단한 자존심이나
강한 자기주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존엄감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훨씬 가깝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 문장은 보통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물론 맞는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에
분명한 순서와 우선순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 몸같이’라는 말이 먼저다.
나를 사랑하는 감각을 모른 채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은 아니다.
나를 돌보지 않고,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존엄감은
자기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도 내 편이 아닌 순간에도
내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힘.
그 힘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칭찬이나 인정,
관계나 성과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건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순간부터 만들어진다.
존엄감이 낮아질 때를 떠올려보면
대개 비슷하다.
싫은 걸 괜찮다고 말했을 때,
선을 넘었는데 웃으며 넘겼을 때,
나를 작게 만드는 선택을 하면서도
합리화했을 때.
그때마다
존엄감은
눈에 띄게 무너진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먼저 가볍게 다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존엄감이
이기심과 같은 말은 아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태도는
존엄감과 닮아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나는
자기 사랑과 이기심 사이 어딘가에
존엄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버리기 위해서도 아닌
그 중간 지점.
그 지점을 잘 찾게 되면
굳이 존엄감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존엄감이 남는다.
물론 이 감각은
처음부터 쉽게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조금씩 배우게 된다.
그래서 좋은 멘토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조금 덜 돌아갔을 선택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존엄감을 만드는 책임은
언제나 나에게 있다.
누가 알려줄 수는 있어도,
대신 선택해 줄 수는 없다.
존엄감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지켜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태도다.
나는 이제
존엄감을
내가 나를 귀하게 대하는
반복된 선택의 결과라고 본다.
그 선택이 쌓일수록
외부가 흔들려도
안쪽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네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존엄감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