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강함에서 나오는 선택
어릴 때부터
나는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특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때
그 말은 늘 따라다녔다.
그 말이 싫었던 건 아니다.
칭찬이었고,
적어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을 들을수록
내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착하다는 게 도대체 뭘까.
그건 정말 좋은 걸까.
돌이켜보면
내가 받아왔던 착하다는 평가는
성격에 대한 것이기보다
태도에 가까웠다.
나는 대체로 타인에게 잘 맞췄고,
불편함을 만들지 않았고,
상대의 기준에 나를 조정하는 데 익숙했다.
좋게 말하면 배려였다.
상대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갈등을 만들지 않는 태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착함은
내 안에 이상한 흔적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쌓였고,
쉬이 넘어간 일들이 기억에 남았고,
괜찮다고 했던 순간들이
그대로 응어리가 되어 남았다.
그때 처음으로
배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배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보다 충분히 강하거나,
베풀고도 흔들리지 않을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에 가깝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배려를 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불편해지기 싫어서,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서,
내 감정을 뒤로 미룬 채
맞추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 태도는
겉으로는 착해 보였을지 몰라도,
내 안에서
계속 나를 소모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착함을 다시 정의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착함은
타인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착함은
나를 지운 상태에서 선택하는 태도가 아니다.
진짜 착함은
나 다움과 강함을 갖춘 상태에서
베푸는 배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그 배려가
상대에게도 왜곡되지 않고,
나에게도 상처로 남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강해지기로 했다.
강해진다는 건
날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는 괜찮고,
어디부터는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분명히 하는 것.
그래서 더 많이 공부했고,
더 오래 고민했고,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에 따라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시켜 가기로 했다.
강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배려가 가능해졌다.
맞추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줘도 괜찮은 여유가 생긴 뒤에야
그 배려는
응어리가 아니라 좋은 관계와
영향력으로 남았다.
나는 이제
착하다는 말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말이
맞춤을 의미하는지,
강함에서 나온 선택인지를
조용히 구분한다.
착함은
성격이 아니라 상태다.
나를 잃지 않은 상태,
나를 지킬 수 있는 상태.
진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먼저
강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도 유효하며
너도 그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