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손해와 보이지 않는 손해
손해를 감수한다는 말에는
늘 불편함이 따라온다.
괜히 손해를 택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택은
손해를 피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지.
지금 당장 잃는 것이 없고,
굳이 불편해질 이유도 없으니까.
그 선택은 대개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내가 살아오며 느낀 건
손해를 피하는 선택이
항상 안전하거나 평안한 삶으로
나를 인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할수록
내 인격의 상태는 쪼잔해져 갔고
판단력은 꾸준히 흐려졌다.
이번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았고,
조금만 스스로와 타협하면
손해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선택들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은 감각은
이상하게도 편안함이 아니었다.
손해는 보지 않았는데
삶의 격이 떨어져 있었고,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잃지는 않았지만
방향을 잃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손해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손해에는
눈에 보이는 손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가 있다는 것을.
돈이나 물건같이
눈에 보이는 손해는
대부분 회복이 가능하다.
다시 벌 수 있고,
다시 사거나 만들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옅어진다.
하지만
양심, 인격, 시간, 기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스스로와 타협하여 생긴 손해는
종국에는
그 문제의 시작점마저
알아차리기 어렵게 된다.
조금씩 쌓이고,
조용히 스며들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지켜왔던 나다움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손해를 감수한다는 건
모든 불리함을 떠안겠다는 뜻이 아니다.
무조건 손해를 택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이 손해를 피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내려놓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은
대개 어리 석어 보인다.
칭찬받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고,
때로는 괜히 고집부리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선택들 덕분에
나는 적어도
어디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선을
지킬 수 있었다.
손해를 피해서 얻은 것들은
대부분 빠르게 흩어져버렸다.
반면 손해를 감수하며
지켜낸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내 안에서 나다움을 지켜주는
원동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손해를 볼지 말지를
첫 질문으로 두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손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어떤 기준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은
나를 크게 만들지는 않는다.
눈에 띄는 성과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선택은
나를 오롯이 나로 살 수 있도록
지탱하는 힘으로 내 속에 쌓여간다.
그 누가 손해를 선호하겠는가?
나 역시 여전히
손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순간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눈앞의 손해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를
더 경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