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비워두는 자리의 필요성

by 이키드로우

여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게으름도 아니고,

도피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여백은

삶이 숨 쉴 수 있도록

일부러 비워두는 공간에 가깝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삶을 가득 채운다.


일정으로,

역할로,

책임으로,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선택들로.


그러다 보면

삶은 멈추지 않고 굴러가지만,

정작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느껴지지 않게 된다.


여백은

그 흐름을 잠시 늦추는 일이다.

더 잘하기 위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다시 느끼기 위해 멈추는 것에 가깝다.


여백이 없으면

생각은 깊어지지 못하고,

감정은 정리되지 못하며,

선택은 늘 급해진다.


그래서 여백은

삶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하나의 장치에 가깝다.


여백은

포기와도 다르다.

무언가를 내려놓되,

도망치지 않는 상태다.


아직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지금 당장 답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대로 두어둘 줄 아는 태도.

그 태도 속에서

삶은 다시

자기 속도를 되찾는다.


여백이 생기면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것,

애써 무시해 왔던 감정,

계속 미뤄두었던 질문들.


그것들은

늘 거기 있었지만,

여백이 없을 때는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여백은

삶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정확하게 조준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더 채우기보다,

의도적으로

비워둘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삶은

가득 찼을 때보다,

여백이 있을 때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여백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삶이 다시 정렬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를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을 때,

삶은

조금 덜 버겁고,

조금 더 나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