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고 있는데도 공허해지는 이유

채웠는데 남지 않는 하루들

by 이키드로우

분명히 잘 쉬었다.

맛있는 것도 먹었고,

사람들도 만났고,

보고 싶은 것들도 봤다.

하루를 돌아보면

빠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루가 끝나고 나면

괜히 비어 있다.

무엇이 부족했는지 묻기에는

이미 충분히 채운 것 같고,

무엇을 더 해야 했는지 묻기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공허함은

부족해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누렸다고 느낀 날에

더 자주 찾아온다.

채웠는데 남지 않았을 때,

하루가 통째로 흘러가 버렸을 때

이 감정은 선명해진다.


누림이 공허해지는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날의 경험들이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

좋았던 순간은 있었지만

그 순간들이

하루의 맥락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억은 남아도

의미는 남지 않는다.

사진처럼 장면은 떠오르는데,

그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누렸다는 사실만 남고,

왜 누렸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공허함은

행복이 없어서 생기지 않는다.

행복이

하루를 관통하지 못할 때 생긴다.

즐거움이 점처럼 흩어져 있고,

그 점들을 잇는 선이 없을 때

하루는 쉽게 비워진다.


그래서 누림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누림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돌아볼 기준이 없을 때다.

그날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때

공허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채웠는데 남지 않는 하루는

대개 이렇게 끝난다.

무언가를 더 원하게 만들고,

다음에는

조금 더 누리면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남긴다.

그리고 같은 방식의 하루가

다시 반복된다.


누림이 공허해지는 이유는

누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루가

어디에도 닿지 않아

나만의 서사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